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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마음의 가난’ 두렵다


배가 부른 만큼 우리는 어쩌면 삶의 아름다움을 잊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러나 요즈음 확실히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갔습니다. 물질의 풍요,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마음의 황폐해진다면 그건 쓸쓸한 일입니다. 물질이 풍요로워져 우리 마음이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일 텐데, 물질에 매여 우리 마음이 피폐해진다면 그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겠지요.

젊은 시절 유난히 술을 좋아했던 어느 원로 언론인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모처럼 생긴 원고료를 받아 가지고 오는 길에 그 분은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답니다. 더욱이 집으로 오는 길목에는 곳곳에 선술집이 늘어서 있어 그곳을 지나쳐 오기가 여간 곤욕스럽지 않았답니다. 마침내 마지막 술집, 추운 방에서 자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생각하면 마땅히 그냥 지나쳐야 옳았지만 도통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랍니다.

그리하여 딱 한 잔만 마시기로 하고 그 술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그때의 술맛이 얼마나 꿀맛이었겠습니까. 딱 한 잔만 마시고, 내려놓기 싫은 잔이었지만 힘없이 내려놓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마시고 싶은 생각이야 간절했지만 이렇게 자꾸 축을 내다보면 쥐꼬리만한 원고료로 당장 먹을 양식도 못 마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일어나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몽땅 그 원고료를 주어 버렸습니다. 오다가 하도 목이 말라서 딱 한잔만 마셨노라고, 그래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분의 아내는 참으로 잘했다. 다음 부터는 한 잔만 마시지 말고 드시고 싶은 만큼 드셔라.

설마 우리가 굶어죽기야 하겠느냐, 그랬답니다. 그 순간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 분은 말없이 돌아누웠는데 아내도 마찬가지로 돌아누워 한없이 베갯잇을 적시더라고요.

진실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란 풍족보단 오히려 조금 모자라는 듯한 모습이 아닐까요? 상처받고 얼룩진 사람 삶의 모습, 그리고 눈물....., 그러나 그 속에서 훈훈하게 비치는 인간미, 거기서 우리는 더욱 진한 삶의 향기를 느낍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가난하기를 원하겠습니까. 가난은 때때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위세를 떨어뜨리고 추하게 만들기도 하며 이루고자 하는 일도 제대로 성취할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가난은 모든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고 벗어나고 싶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석가는 그보다‘마음의 가난’을 제일 두려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물질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실상 우리는 그러한 현상을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반드시 불행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비록 헐벗고 철따라 갈아입을 옷이 없어도 언제나 즐겁게 살아가는 가정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 가족간의 반목과 질시, 돈 때문에 일어난 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그것은 곧 물질이 그 가정의 행복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난을 벗어나려는 생각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가난 그 자체를 긍정하며 그 속에서 행복을 구하려 하지 않고 늘상 허황된 생각을 품은 것 말입니다. 그래봤자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잡념 없이 하루하루 성실하게 생활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난을 벗어나는 지름길이자 또한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길이 아닐는지요.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의 동쪽에 있는 어느 마을은 경치 좋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관광지가 되지 않으려고 모든 마을 주민이 애를 쓴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엔 경치 좋은 곳이면 흔히 볼 수 있는 호텔이나 여관이 단 한곳도 없는 게 특징이랍니다. 그런데 어느 약삭빠른 외지인이 꾀를 내어 한 주민을 매수한 다음 그 사람의 이름으로 집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규모를 엄청나게 늘려서 조금만 고치면 호텔로 쓸 수 있도록 말이지요. 하지만 주민들은 곧 그 조작극을 눈치 채게 되었고 결국엔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을을 물러나면서 그 외지인이 주민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렇게 잘사는 같지도 않은데 왜 이 마을은 관광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까? 관광객을 받아들이면 엄청난 돈은 벌 수 있을 텐데,” 그러자 그들은, 자기네들은 가난하지만 돈으로 인해 타락해지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돈과 순수 중에서 순수를 택했던 것이지요.

돈으로 인해 많이 혼탁해져 있는 요즘 세상입니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하든 평가의 잣대가 순전히 돈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거기에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아펜니노 동쪽 마을 사람들이 외려 바보스럽고 시대에 뒤 떨어져진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연을 사랑하고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그네들의 고운 심성만은 우리가 본받고 부러워해야 하지 않을 까요.

-작가노트-
예시한 언론인은 몇해전 고인이 된 이 성순(이 목우)선생입니다. 부산출신으로 서울대 영문과를 나왔고, 부산일보 문화부 차장을 거쳐, 부산매일 편집위원을 지냈습니다. 퇴근길엔 광복동 목마다방에 들려 문학인들과 부산을 노래했고, 뒷골목 막걸리집 '양산박'을 찾아 한잔의 막걸리에 선구자를 구슬프게 목청높이 부른곤 했던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