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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가을 이야기

가을은 소리의 계절이다.
어수선한 도심의 한 귀퉁이에서도 땅거미가 지면 무슨 소리가 들린다. 씻을 듯이 귀를 맑게 하는 소리, 삐르르. 삐르. 삐르. 삐르르......,의성어가 풍성한 우리말로도 미처 옮길 수 없는 소리이다.
가만히 숨을 멈추고 가을이면 온 세상은 그 귀뚜라미 소리로 가득찬다. 하찮은 풀벌레들도 무슨 개성이 있는지 좀 운치를 내는 측도 있고, 그 냥 담담하게 소리를 내는 벌레도 있다. 하지만 그 헤아릴수 없이 맑은 소리들이 멀고 가까이에서 화음을 우루는 소리는 사뭇 별천지의 교향곡이다.

옛 시구(詩句)들을 음미해 보아도 가을의 詩엔 으레 무슨 소리가 등장한다. 당(唐)시인 이백(李白)은 장안(長安)엔 일편(一片)의 달이 걸려있고 가을바람은 우수수 부는데 ‘만호도의성(萬戶擣擬聲)’이라고 읊조린다. 옷을 다듬는 다듬이잇소리,
중국 율시(律詩)의 王者格인 두보(杜甫)의 詩는 언제나 애조(哀調)가 곁들여 있다. 공연한 슬픔이 아니라 인정의 허무함, 세상사의 무상(無常)함이 그 심저(心底)를 이룬다. 그는 가을이면 원숭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늙음과 불우(不遇)를 한(恨)한다. /바둑판처럼 변하는 서울소식, 백년세사(百年世事), 그 슬픔을 누를수 없구나....../ 杜甫는 이 ‘추흥(秋興)에서 북녘의 북소리(金鼓)도 듣는다.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을 입어 長安(서울)은 7년을 사이에 두고 그 主人이 네 번이나 바뀐다. 수런거리는 세정(世情)에선 북소리마저 애절하게 들린다. /과일 떨어지는 소리/./등잔불아래서 풀벌레 우는 소리/. /맑은 샘물 돌 위에 흐르는 소리/......, 이것은 모두 왕유(王維)의 가을 소리들이다.

낙엽이 지고 있다. 움이 트고 잎이 피어나고 곱게 물이 들더니, 이제는 또 한 잎 두 잎 가을바람에 실려 쓸쓸히 지고 있다. 빈 가지 들은 허허로운 하늘 아래서 긴 겨울의 침묵을 맞으리라. 새봄이 올때까지는. 이것은 조용한 우주 질서,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되풀이될 하나의 생명 현상이다. 인간사도 이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나서 자라고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이런 현상을 불가(佛家)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生)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사(死)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스러짐이라.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 나고 죽음 또한 그런 것이다. 한 물건 있어 항상 또렷하니, 그것 고요해서 생사에 따르지 않네.’

서걱이는 가을바람 소리는 쓸쓸하고 적막하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기운이 서려 있다. 이 풍진 세상을 허둥지둥 살아가느라 메마르고 팍팍해진 심성을 때로는 여행을 통해 쓰다듬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하는데......그리고 정서적인 안정과 영혼의 휴식을 위해서는 오장육부가 환희 들여다보일 것 같은 눈부신 전등불보다 은은한 등잔불이나 촛불이 또한 그립다.
‘삐르.삐르르. 삐르.....’ 자연의 소리인 귀뚜라미 소리를 도심 아파트에서 들을 수 있는 소슬함, 그러면서 또 이 가을이 깊어가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