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I Think

노블리스 노블리제


노블리스 오블리제. 명예(Noblesse)만큼의 의무(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프랑스 말이다.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민주주의가 그렇게 발달했다는 유럽에서 지금도 귀족들이 ‘불평등하게’특별한 대접받을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반대로 노블리스 노블리제다. 명예(Noblesse)만 있고 의무는 없다(No-Oblige)는 말이다. 국가를 위해 평생 몸바쳐 일한다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는 장관님을 비롯한 고위공무원 등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의 자식 군대 면제율이 높다는 사실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 비겁한 사람들이다. 누릴 것은 누리되 할 것은 하지 않는 부류들이다.

지난 22일 별세한 최규하 전 대통령도 이러한 관점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본다. 일반 시민이 어떤 사건현장을 목격하고 증언하지 않으면 법을 ‘엄포로’어떻게든 진술을 받아내지만 최 전대통령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특권만을 누렸을 뿐 그에 따른 책임은 외면했다. 설령 대통령으로서 12·12 사태를 막지 못했다하더라도 이후 그 잘못된 사실만이라도 바로잡았어야 했다. 일설에 비망록이 있을 것이고 그게 모든 것을 얘기할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 역시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살아생전에 신군부의 만행을 역사 앞에 증언했어야 했다. 수십년간 있었던 직접 증언의 기회를 스스로 외면하고 달랑 글만 남기고 간 것은 책임회피다.

우리는 아직도 12·12이후 5·18까지 대한민국 역사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가장 확실한 증인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신군부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할 때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는 받았는지, 5·18 관련 광주 발포는 어떻게 이뤄졌는지 등 가장 중요한 사실들은 여전히 물음표다. 노블리스 노블리제가 판치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최 전대통령의 별세보다 비겁하게 묻혀지는 역사가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