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I Think

만추(晩秋)


“한 잎, 두 잎, 대여섯 잎/ 그러다 바람이 불면/ 앞이 아니 보이게 쏟아져// 낙엽이 뺨에 부딪친다/ 내 눈을 스치던 그 머리카락/ 기억은 헐벗은 나무 같다// 바바리 깃을 세우고/ 낙엽에 묻히는/ 十一월 오후를 걷는다” 영문학자, 수필가로 잘 알려진 피천득(1910~)의 시 ‘만추’(晩秋) 전문이다. 대체로 투명한 서정으로 일관해 모든 관념과 대상을 배제한 순수한 시정이 넘치는 작품들을 쓴 작가.비록 입동이 지났지만 만추의 스산함을 느끼게 하는 시다. 누군가는 입동을 살짝 지나면 속절없이 겨울이 온다고 했지만 아직까지는 늦가을의 정취가 있는 만추를 간직하고 싶은 시간이다.

우리에게는 만추와 관련된 아주 오래된 영화가 있다. 바로 이만희감독(1931~1975)의 1966년 작품 ‘만추’. 영화는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혜림이 사흘간의 특별휴가를 얻어 어머니 산소를 찾는데서 시작된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위조지폐범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난다. 외로운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사랑을 나누고, 일년 후 창경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청년은 체포되어 감옥에 가고, 혜림은 모범수로 가석방된다. 약속한 그날, 하염없이 청년을 기다리는 혜림 뒤로 낙엽들만 가득하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많지 않은 대사, 흑백의 절묘한 톤으로 한 심리묘사로 관객들을 무거운 침묵으로 몰아 넣었던 영화다. 해마다 늦가을을 맞을 때면 생각나는 영화지만 영화의 감동만을 찾기엔 요즘의 만추는 짧은 느낌이다.

“이제는 내 눈이 보여서/ 만상은 나를 당황하게 한다/ 한 여름내 철없이 피어 있던/ 앉은뱅이 꽃도 가고”(권택명의 ‘만추’)처럼 계절이 쉬 바뀌나 싶더니 어느새 또 가을이 가는 길목에 섰다.부산에서도 붉은 빛을 토해내는 단풍나무들과 은빛 억새 군락지가 있어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은빛 억새를 뒤로 하고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모습에서 가을은 익어가고, 조용히 가랑잎이 떨어지는 산행에서 가을이 가는 소리가 듣는다.

그러나 빈자리에 수북했던 영화속의 낙엽과 야윈 가지끝에 매달려 떨고 있을 까치밥을 떠올리면 만추는 한없이 쓸쓸하다. 겨울이 멀지 않은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