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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새해 새아침


'프롤로그’
이웃 김병환님, 푸른호수 홍덕기 님, 강태웅님, 동행인, 그리고 제주도 김봉선님, 또 최현정 기자…….
새해 첫날, 무량한 하늘이 첫 닭 울음소리에 열립니다. 대지를 빗질 하는 성긴 빗발 또는 눈발, 다시 꿈속에 들어와 꿈꿀곳을 비웁니다.
우선 이 짧은 글로 지난해 정(情) 을 새기려 합니다. 지난해 정말 고마웠습니다.

희망을 풀무질하며
삼백예순날, 달력 켜켜이 고인 추억들, 누런 갈피에 펄럭이는 노여움, 분노, 서랍 속에 가두고 새말의 망치로 못질한다. 그저 건강하게, 그저 맘고생 없게, 가난한 소망들, 갑신년 밀어내는 세밑 속에 기울 어가는 부산 야경을 한 컷하러 ‘천마산’에 올랐다,
정말 추웠다. 힘든 갑신년이 더 붙들고 있으려는지... 그러나 희망을 풀무질하며, 저무는 한해의 마지막 야경을 담았다. 그러나 바람이 세차, 삼각대가 흔들려 마음에 흡족하지 못했다. 그저 저문 마지막 날의 야경을 담았다는 것에 뜻을 두고 싶다.

‘누군가의 풍경이 되고 싶습니다.
구랍 새벽 6시 창문을 여니, 하얀 눈이 소복이 앉아 있어, 부랴부랴 챙기고 이웃 김병환님과 부산 해운대 보단, 경주에 가기로 결정해 내달았다. 그러나 도로가 결빙이라 차들은 거북이 걸음. 더구나 경주에 가까울수록 나무에 눈이 걸려 있지 않았다. 겨우 9시경 도착했더니 불국사를 오르는 도로는 차량 홍수,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마음에 목적지를 ‘서출지’로 급선회했다. 그곳도 눈은 그저 흔적만 남겼을뿐이라 아쉬운 갈증만 남아버렸다.
“비상을 꿈꾸며”
‘해가 바뀌었다. 서른 세번 울리는 제야의 종소리 속에 새해는 밝은 것이다.
절간에서 울린 범종은 1백8번이었다. 거기엔 까닭이 있다. 사람에게는 여섯 개의 사심(邪心)이 있다. 탐욕스러움, 노여움, 어리석음, 교만스러움, 의심, 간악한 마음, 이 여섯 개의 마음이 각각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의(意)의 여섯 감각(感覺)에 따라진다.

이것을 모두 합치면 36개의 번뇌가 생긴다. 번뇌는 그러나 오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제도 있었고, 그리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36개의 번뇌를 다시 셋으로 곱하면 꼭 1백8개가 되는 것이다. 이런 1백8개의 번뇌를 하나하나 모두 내자고 1백8번 종을 울리는 것이다.
제야의 범종은 묵은 해가 다 가기 전에 1백7번을 치고 새해가 막 밝을 때 마지막 한번을 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형식이라도 좋다. 그렇게 매듭을 짓는 것은 좋은 일이다. 1백8개의 번뇌가 묵은 해와 함께 사라졌다 해도 새해에는 또 다시 새 번뇌가 1백8개 생기게 마련이다. 새해라고 모든 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묵은 해로부터 연속되기 때문이다. 바뀌는 것은 ‘캘린더’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1백8개의 번뇌가 새해라고 줄어들 것은 아니다. 1백8개 이외의 새 번뇌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탐욕스러움, 어리석음, 간악스러움……. 이 모두는 새해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괴롭힐게 틀림이 없다.

그래도 새해란 역시 좋은 것이다. 뭔가 새로운 기대를 걸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적어도 묵은 해의 온갖 괴로움이며 슬픔이 새해에는 조금이라도 덜어지기를 기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좋은 것이다.

새해, 새 아침,
태양은 그냥 찬란하지 않아도 좋다. 그토록 역겨웠던 한해가 이제 완전히 과거 속에 묻혔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후련해지는 것이다. 꿈도 그리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아직도 꿈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도 우리에겐 여간 대견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초가삼간의 소박한 꿈을 안고 살던 어버이들의 후예(後裔)인 것이다.

오순도순 그저 평화롭게 살 수만 있어만 그것을 우리는 천만다행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악(惡)에 물들지 않고, 부정(不正)에 굽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제야의 종소리가 메아리쳐 오는 것이다.
새해 1백8개의 새 번뇌들이 싹터 오르듯 그렇게 새 아침의 서기(瑞氣)가 퍼져오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또 한해를 살아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삶의 지혜를 터득 해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