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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잊혀진 제주를 찾아서

(제주도의 옛날이야기)
제주는 물빛 고운 나라입니다. 그 물빛은 본디 섬사람의 심성을 닮았습니다. 또한 한라산이 빚어낸 360개의 오름은 넉넉하고 아늑한 제주도민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나 과거, 한라산에 기대고 사는 제주도민의 생활은 착박했습니다. 물과 바람과 돌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면서, 조상들의 물려준 말과 문화를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제주도가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제주 한라산을 다섯 번째 올랐습니다. 지난6일부터 8일까지 추사거적지, 산방산, 우도, 한림 돌공원, 분재원, 대정 바닷가, 성산 자성원 등 곳곳을 취재했습니다만 뭔가 허전한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부분이 현대화되고 관광지화 된 제주도를 보면서 과연 제주도의 원형은 어디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1996년 제주도에서 발간한 사진집 ‘제주 100년’속에서 그 편린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홈피 여러분들과 함께 잠시 과거로 돌아가 제주도민들의 사람 옛 삶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필자에겐 귀중한 자료입니다. 사진은 사진집에서 발췌하였으므로 선명치 못합니다. 그 당시 사진술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대정읍 마을 어귀의 돌하르방

세 개의 돌하르방 표정속에는 제주의 험난한 자연과 싸워 이긴 제주인의 결연한 의지와 당당함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제주인의 넉넉함이 녹아 있는 것 같다.
*1980년대 산지포구 모습

산지포구 해안선 따라서 다닥다닥 들어선 초가집들과 포구에 들어선 돛배들이 인상적이다.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마친 할아버지가 조랑말에 짐을 싣고 돌아오는 동안 한라산 머리에 구름이 걸려있다.
* 산지내의 여름 풍경

한철 산지내의 세답(세탁)과 멱감는 터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깨끗했던 산지내도 복개가 이루어져 앞으로 이러한 모습은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 태우와 어부

태우는 표준말로 떼배인데, 통나무 여러개를 구멍으로 뚫어 가는 나무로 연결해 놓고 앉을 수 있는 상자리만을 높인 원시적배다. 연해에서 이 배를 이용해서 자리돔을 그물로 떴다.
*바다와 어린 해녀들

바닷가의 아이들은 대개 열대여섯부터 물질을 하는데 족세눈에 망사리와 호미를 든 어린 해녀의 눈매가가 진지하다.
*구마실신부( 본명 마르셀 리쿠르)와 여신도들

제주도는 1898년 프랑스 신부에 의해 처음 천주교가 들어왔다. 그러나 신도들과 제주도민의 갈등은 1901년 5월 ‘이재수의 난’을 축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맨 오른쪽 아래 여덟 번째 앉은 이가 구마실신부로 그는 ‘이재수의 난’에 직접적으로 관계하기도 했다.
*도두동 포구의 물맞이

제주시 도두동 포구가에는 당시 콘크리트로 물을 일부분 막아 주민들이 물맞이를 하고 있다. 물맞이하는 이의 시원한 모습도 이색적이지만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더욱 재미있다,

* 물을 받기 위해 놓아둔 양동이와 양철 허벅 그리고 허벅들이 변환기의 혼재한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주도는 7월1일부터 ‘특별자치도’가 된다. 그러나 인구 40만에 거의 외지인이 태반이고, 원 주민은 그리 많치 않은 것 같다. 농지, 임야 등도 외지인의 삼분의 이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는 특별자치도를 추진하면서 도시구획, 지구단위 계획을 마친 상태로, 땅값도 지역간 차이는 있지만 상당히 상승했다는 것이 부동산 중개인의 말이다. 필자가 숙박했던 팬션주인도 모두 외지인, 충청도와 서울사람이었다. 호황일때 투기를 했는지., 지금은 팬션이 포화상태로 매물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업은 잘 된다는 것이다. 또 서울등 외지에서 땅, 임야를 살려는 사람들이 매물을 찾고 있으나, 작은 땅은 찾을 수 없다한다. 68세된 어느 분은 과거 법원에 근무하다 정년퇴임했다며. 일주일전 서울에서 내려와 제주시와 25분거리인 애월에 부동산 업자가 건축한 대지 40평에 이층 가옥을 3억이천만원에 매입했다고 한다. 지금 제주도는 미래의 홍콩을 꿈꾸며, 비젼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후한 옛 인심은 찾을 길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