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주에서 자랐고, 제주에서 그 귀중한 정신적, 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몸에 지니고 그것을 나의 정신으로 삼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한번도 제주를 잊어 본적이 없다. 그 푸른 바다, 멀리 눈이 쌓인 한라산...,여덟살의 기억이다.”
한라산은 제주도이고, 제주도는 바로 한라산이다. 한라산은 죽어있는 화산이면서 살아 있는 인간들의 숨결과 그 역사를 송두리째 간직하고 있는 특이한 산이다. 제주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 산을 바라보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제주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제주 사람들의 눈과 가슴으로 들어와 안긴다.
한라산에 오르는 건/ 내 안의/탐욕과 허물을 벚으려 함이 아닌가/ 한라산에 올라/ 그 안의 욕심만 보인다면/ 오르지 말라/ 다 벚어 던진 나무/ 그처럼 벚지 못할 바엔/ 한라산에 안기지 말라/ 오기를 버려라/눈꽃, 햇살, 바람이 하는 말을 들어라/ 눈꽃이 산행길에 떨어진 욕망을 지운다./
바로 지난 20일, 고요한 한가로움, 내마음의 정신, 그리고 정서를 찾아 천천히 한라산에 등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곳에 가면 어디엔가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들어가는 문이 있을 것이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이다.. 그래서 올라갔다. 아주 천천히, 달팽이처럼,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움직임의 쾌적인 남는다. 온몸으로 걸어가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걷는다는 것은 땅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땅과의 교감이다.
산행코스는 어리목으로 정했다. 19일 폭설로 교통통제 탓인지 한라산을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했다. 어리목 매표소를 지나 산의 입구에 들어서니 한라산 특유의 설경이 나타났다. 나무마다 켜켜이 눈을 뒤집어 쓴채 신령스러우리만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겨울 한라산의 아름다움은 설화(雪花)인가 보다. 어리목을 들어서면 길 숲에 때 아닌 하얀꽃이 피어 있다. 이 꽃을 보러 온 것 아닌가. 세상 갖가지 나무들이 평소에는 저마다 다른꽃들을 피우는데. 이때만은 자신의 꽃을 다 숨겨두고 오직 다른 나무들이나 풀들과 어울려 오로지 한종류 눈꽃만 피운다. 그런데도 그 한색으로 피어있는 단조로운 꽃무더기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아름답다
얼어붙은 듯한 싸늘한 나무 겉몸체가 눈을 시리게 하는데, 그 가지가지마다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그대로 얼어 붙으면서 때아닌 꽃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그꽃들이 형상이 천차만별이다. 눈이 발목을 감추도록 쌓인 산속으로 들어가면, 잠목 동아리는 찬바람에 닳을 대로 닳아져서 반들반들 윤기를 내면서 눈을 시리게하면서 깨끗하게 씻어 준다. 그런데다 찬 겨울바람에 말갛게 씻겨진 파란얼굴을 내밀고 묵묵하게 버티어 있는 굴거리나무들을 만나면서, 겨울의 생기를 한껏 더 느낀다. 솜처럼 부드러운 설화로 변해 있는것이다.
얼굴을 비벼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얼굴에 묻은 눈을 털고 고개를 갸웃어리는 누운 향나무와 조릿대들이 봄의 기지개를 켜는 것읋 보면서, 한라산 자체가 정밀(靜謐)속으로 가라앉은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설화의 맛은 그 외양의 아름다움에만 있지 않고, 그것이 풍겨주는 이상한 편안과 안식에 있다.
더구나 철따라 제꽃을 피우던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온통 자기를 잊어버리고, 한 가지 꽃을 그렇게 열심히 피우게 만드는 그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제 잘났다고, 제 멋대로 취해 살아온 꽃과 나무들이 한 겨울 눈을 만나면 자신을 모두 숨기거나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의 눈꽃을 피우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해 하는 것 같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일까. 설화의 맛은 그 외양의 아름다움보다는 여기에서 더한다.
눈이 더 쌓이고, 나무들이 눈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여 어깨를 늘어뜨릴 정도가 되었을때 눈꽃 또한 일품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바람에 의해 쌓인 눈이 이 지상에서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기기괴괴한 영상을 만들어 낸 것을 보면서 이 아름다움에 입을 다문다.
한라산에 내린 눈이 엮어 내는 사연들이 이렇게 모두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눈이 내리다가 날이 하얗게 개일때 적당하게 쌓인 눈 벌판에 햇살이 잔잔하게 부서질때 ‘만세동산’ 서쪽으론 산과 눈의 조화를 이룬 겨울 한라에 대해 한편 무섭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다. 나는 이 장면에 격렬한 감정의 요동을 한참이나 겪었다. 그것은 바로 전율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전율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자연의 조화에 대한 성스러운 인식이고 경탄이다.
그것은 평화일 수있고, 아니면 안식보다 더한 휴식일 수 있다. 자연의 조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창조주가 세상을 만드시면서 일곱 번이나 ‘좋다’고 찬탄한 그 경지가 바로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이 정황을 언어로서는 표현하고 설명할 길을 잃어 버리고, 그저 침묵으로 언어를 대신했다.
그것은 이처럼 한라산의 심원한 모습앞에 인간의 사유가 하찮음을 문득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하늘 끝에서 세찬 바람이 몰려와서 눈앞이 어둑해 진다. 한라산의 요사스러운 심술인지, 아니면 그 깊은 인식을 시기한 산신(山神)의 질투인지 세상이 순식간에 뒤바뀐다. 그렇게 아름답던 산과 눈과 햇살이 어울려 만들어 놓은 질서가 순시간에 뒤범벅이 되어 순간을 본다. 아니 그러한 사유조차도 단절되어 버린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은 공포뿐이겠다고 생각된다.
눈이 쌓인 한라산을 멀리서 보면 항상 여유있고, 편한하고 아름답고 친근하다. 그러나 밟고 허리르 펴면, 문득 한라산은 하늘을 향해 굉음을 토하던 태고로 돌아가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은 불가해지면서 알 수 없는 숭엄한 비애에 빠지게 된다. 이때야 비로소 한라산의 위용(威容)과 그 넉넉함을 알 수 있게 된다.
한라산은 제주도이고, 제주도는 바로 한라산이다. 한라산은 죽어있는 화산이면서 살아 있는 인간들의 숨결과 그 역사를 송두리째 간직하고 있는 특이한 산이다. 제주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 산을 바라보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제주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제주 사람들의 눈과 가슴으로 들어와 안긴다.
한라산에 오르는 건/ 내 안의/탐욕과 허물을 벚으려 함이 아닌가/ 한라산에 올라/ 그 안의 욕심만 보인다면/ 오르지 말라/ 다 벚어 던진 나무/ 그처럼 벚지 못할 바엔/ 한라산에 안기지 말라/ 오기를 버려라/눈꽃, 햇살, 바람이 하는 말을 들어라/ 눈꽃이 산행길에 떨어진 욕망을 지운다./
바로 지난 20일, 고요한 한가로움, 내마음의 정신, 그리고 정서를 찾아 천천히 한라산에 등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곳에 가면 어디엔가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들어가는 문이 있을 것이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이다.. 그래서 올라갔다. 아주 천천히, 달팽이처럼,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움직임의 쾌적인 남는다. 온몸으로 걸어가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걷는다는 것은 땅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땅과의 교감이다.
산행코스는 어리목으로 정했다. 19일 폭설로 교통통제 탓인지 한라산을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했다. 어리목 매표소를 지나 산의 입구에 들어서니 한라산 특유의 설경이 나타났다. 나무마다 켜켜이 눈을 뒤집어 쓴채 신령스러우리만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겨울 한라산의 아름다움은 설화(雪花)인가 보다. 어리목을 들어서면 길 숲에 때 아닌 하얀꽃이 피어 있다. 이 꽃을 보러 온 것 아닌가. 세상 갖가지 나무들이 평소에는 저마다 다른꽃들을 피우는데. 이때만은 자신의 꽃을 다 숨겨두고 오직 다른 나무들이나 풀들과 어울려 오로지 한종류 눈꽃만 피운다. 그런데도 그 한색으로 피어있는 단조로운 꽃무더기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아름답다
얼어붙은 듯한 싸늘한 나무 겉몸체가 눈을 시리게 하는데, 그 가지가지마다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그대로 얼어 붙으면서 때아닌 꽃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그꽃들이 형상이 천차만별이다. 눈이 발목을 감추도록 쌓인 산속으로 들어가면, 잠목 동아리는 찬바람에 닳을 대로 닳아져서 반들반들 윤기를 내면서 눈을 시리게하면서 깨끗하게 씻어 준다. 그런데다 찬 겨울바람에 말갛게 씻겨진 파란얼굴을 내밀고 묵묵하게 버티어 있는 굴거리나무들을 만나면서, 겨울의 생기를 한껏 더 느낀다. 솜처럼 부드러운 설화로 변해 있는것이다.
얼굴을 비벼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얼굴에 묻은 눈을 털고 고개를 갸웃어리는 누운 향나무와 조릿대들이 봄의 기지개를 켜는 것읋 보면서, 한라산 자체가 정밀(靜謐)속으로 가라앉은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설화의 맛은 그 외양의 아름다움에만 있지 않고, 그것이 풍겨주는 이상한 편안과 안식에 있다.
더구나 철따라 제꽃을 피우던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온통 자기를 잊어버리고, 한 가지 꽃을 그렇게 열심히 피우게 만드는 그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제 잘났다고, 제 멋대로 취해 살아온 꽃과 나무들이 한 겨울 눈을 만나면 자신을 모두 숨기거나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의 눈꽃을 피우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해 하는 것 같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일까. 설화의 맛은 그 외양의 아름다움보다는 여기에서 더한다.
눈이 더 쌓이고, 나무들이 눈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여 어깨를 늘어뜨릴 정도가 되었을때 눈꽃 또한 일품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바람에 의해 쌓인 눈이 이 지상에서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기기괴괴한 영상을 만들어 낸 것을 보면서 이 아름다움에 입을 다문다.
한라산에 내린 눈이 엮어 내는 사연들이 이렇게 모두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눈이 내리다가 날이 하얗게 개일때 적당하게 쌓인 눈 벌판에 햇살이 잔잔하게 부서질때 ‘만세동산’ 서쪽으론 산과 눈의 조화를 이룬 겨울 한라에 대해 한편 무섭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다. 나는 이 장면에 격렬한 감정의 요동을 한참이나 겪었다. 그것은 바로 전율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전율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자연의 조화에 대한 성스러운 인식이고 경탄이다.
그것은 평화일 수있고, 아니면 안식보다 더한 휴식일 수 있다. 자연의 조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창조주가 세상을 만드시면서 일곱 번이나 ‘좋다’고 찬탄한 그 경지가 바로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이 정황을 언어로서는 표현하고 설명할 길을 잃어 버리고, 그저 침묵으로 언어를 대신했다.
그것은 이처럼 한라산의 심원한 모습앞에 인간의 사유가 하찮음을 문득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하늘 끝에서 세찬 바람이 몰려와서 눈앞이 어둑해 진다. 한라산의 요사스러운 심술인지, 아니면 그 깊은 인식을 시기한 산신(山神)의 질투인지 세상이 순식간에 뒤바뀐다. 그렇게 아름답던 산과 눈과 햇살이 어울려 만들어 놓은 질서가 순시간에 뒤범벅이 되어 순간을 본다. 아니 그러한 사유조차도 단절되어 버린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은 공포뿐이겠다고 생각된다.
눈이 쌓인 한라산을 멀리서 보면 항상 여유있고, 편한하고 아름답고 친근하다. 그러나 밟고 허리르 펴면, 문득 한라산은 하늘을 향해 굉음을 토하던 태고로 돌아가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은 불가해지면서 알 수 없는 숭엄한 비애에 빠지게 된다. 이때야 비로소 한라산의 위용(威容)과 그 넉넉함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제 한라산은 사람들의 욕심앞에 늙어가고 있다. 욕심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은 산의 숨소리를 듣지 못한다. 지금 한라산은 외롭다. 번잡스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는데도, 진정 한라산은 친구 하나 없는 외로움에 떨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