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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한라산을 찾아서


"나는 정신의 먹이를 찾아 산에 오른다. 고도를 높여 갈수록 정신은 더 풍요해지고 맑아진다. 자유와 고독과 야성을 찾아가려는 이 행위야 말로 내가 가야하는 길과 닮아 있는지 모른다."



눈을 밟으며 걷는 적설 산행은 바위산보다는 펑퍼짐한 육산(肉山)이 제격이다. 그 대표적인 산이 한라산이라 할까. 한라산은 우선 산림이 울창하여 나무에 핀 눈꽃이 그지없이 아름답고, 특히 구상나무에 핀 설화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찬란하다. 능선에서 맞이하는 매서운 추위는 힘들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여기에 맛보는 기쁨 또한 대단하다.

마음을 다잡고 한라산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은 ‘설국(雪國)’에 가 있다. 더군다나 부산에서 듣는 일기예보는 제주지역에 대설주의보까지 내려졌다고 하니 오늘은 눈 세상에 흠뻑 빠졌다가 돌아오겠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가득 찬다.

매번 찾아가는 제주지만 이번은 한라산을 오르고, 오름 트래킹을 할양으로 계획을 잡고 간다. 비행기가 제주에 가까워질수록 한라산엔 눈이 많이 쌓였다.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밟으며 걷는 적설산행은 기대만 해도 벌써 마음이 따뜻해 온다.

어리목 관리소에 내렸다. 스케일이 큰 산답게 한라산은 울창한 나무에 흰 눈꽃을 덮어써 숭엄한 기운과 아름답게 핀 눈꽃이 딴 세상을 연출하고 있다.하늘 높이 솟은 아름드리 적송이 길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 잡은 잡목들 모습이 그것이다. 이런 곳에 어울린 분위기는 소박하면서도 사뭇 그윽하다.

한라산의 겨울은 눈으로 이야기한다고 했다. ‘동화의 나라’같은 눈 세상이 펼쳐지는 한라산의 겨울은 눈 만물상이 형성된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구상나무 군락지인 이곳은 나무의 줄기나 잎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덮혀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눈사람이 되고 그것이 모양이 각기 달라 만물상이 된다는 이야기다.

어리목으로 들어선 초입은 눈이 많아져 밟으면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낸다. 나뭇가지 위에 섬세하게 피어있는 상고대가 햇빛에 비취어 반짝인다. 상고대가 은빛터널을 이룬 곳을 지날때는 마치 별천지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제비 동산‘에 다 달으니 살을 에는듯한 바람과 수북히 쌓인 눈이 마치 영화‘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가 걷던 눈 쌓인 시베리아 벌판의 혹독한 추위를 연상케 한다. 그런대로 참을 수 있겠는데 살이 노출된 얼굴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힘이 든다. 장갑을 끼긴 했지만 손도 꽁꽁 얼어 버렸다. 바람이 어찌나 거세게 불어오는지 배낭을 매지 않았다면 멀리 날아가버릴 것 만 같다. ‘살을 에는’ 추위의 의미를 실감한다.

그런 후 한참 올라 만세동산에 도착하니 북쪽에서 윗세오름 능선이 손짓한다. 나는 그 한곳에 서서 또 다른 오름을 바라본다. 말없은 오름은 ‘서두르지 말라’고 일러준다.

눈이 발목 위까지 빠지고, 나무에는 흰색을 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쁜 눈꽃이 피어 있으나, 주목에는 어떻게 많은 눈이 쌓여 있는지 가지가 휘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말 그대로 환상적인 풍경이다.
추위와 싸웠던 몇 시간, 그 속에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 설경, 고통속에서 핀 아름다움이 행복함으로 승화되어 내 가슴에 자리 잡는다.

지난해 12월부터 제주 한라산에 눈이 내리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적설량이 어느 정도 깔려야 산행이 적격이다 는 말을 듣고 ‘그렇구나’ 하고 기다리던 차 지난 1일 오후‘내일 오라’는 연락을 받고 비행기 표를 알아봤으나, 주말이라 표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겨우 2일 아침 첫 비행기표를 예약 어렵게 간 길이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다’고 한라산 산행이 통제되면서 다음 날인 3일 아침 8시경 산행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