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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허물을 벗고 싶다


허물을 벗고 싶다. 뱀이 껍질을 벗듯이, 매미가 오랜 기다림 끝에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듯이, 달걀을 깨고 병아리가 나오듯이…. 그렇게 나도 허물을 벗고 싶다.

허물벗기는 어둠의 껍질을 깨고 밝음의 세계로 나옴이다. 견고한 벽을 헐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지난(至難)의 몸부림이다. 벽안에 절어 있는 정체와 오만, 욕망과 집착 같은 구각(舊殼)으로부터의 일탈이고 해체이다. 늘 해오던 타성의 늪, 일상적인 나태의 습벽, 노상 닿아 있던 안주의 시선을 향해 변화의 물결로 밀려오는 패러다임의 낯선 얼굴.

허물벗기는 그래서 신선한 것, 이를테면 자신을 낯설게 하기다. 낯익은 것들을 지워버리는 것, 낯익었던 일과 생각과 인연의 고리를 끊는 것, 그것들을 버리고 그들로부터 떠남이므로 낯설게 하기이다. 그런 탈바꿈의 자락, 그 여백의 빈자리에 피어나는 어여쁜 한 송이의 꽃. 낯설게 하기는 새로운 것과의 약속이고 예단이다. 그래서 낯설게 하기는 허물벗기의 필연적 인과율이다. 그렇다고 허물을 벗기 위한 낯설게 하기를 ‘그냥 낯설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하고 생뚱맞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평범한 시로 권위 있는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받았다. 쉬운 시어를 통한 시적 공감대의 확장이 미국인의 가슴에 시를 여울로 흐르게 하였다. 대중의 가슴속 울림줄을 공명(共鳴)으로 당겨놓은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시는 난해하지 않았다.

그는 낡은 사과상자 위에서 시를 썼다. 나무널빤지 위에서, 혹은 카우보이 농장의 말똥과 조팝나무와 진흙 묻은 쇠가죽구두 바닥을 받치고 시를 썼다. 아무데서나 턱 괴고 앉아 흙 묻은 손으로 시혼을 줄불 놓던 그의 모습이 외로운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아, 그 앞에 하루의 지친 일과를 부려놓아 선홍 빛으로 찬란하게 잦아들던 저녁놀의 황홀함. 그는 그렇게 자신의 허물을 벗었다. 어줍잖은 자신의 태깔을 허문 것이다.

우리는 눈길이 이르는 도처에서 허물 벗는 것을 목도한다. 아이가 자라기 위해 성장통을 앓는 것도 허물벗기의 한 모습이다. 나무는 낙엽으로 허물을 벗는 제의를 엄숙히 치른다. 나무의 허물벗기는 새잎으로 다시 돋아남이다. 눈여겨보면 안다. 낙엽수만 잎이 지지 않는다. 소나무도 잎이 진다. 솔숲 바닥을 더께로 뒤덮고 있는 솔잎의 무수한 주검을 보라. 소나무처럼 내숭떨며 제 허물을 벗는 나무도 없으리라.

나도 허물을 벗고 싶다. 살아온 날들 속의 정한을 한 올씩 뽑아내어 새로운 수틀에다 수선공의 손으로 알락달락 문양의 수를 놓고 싶다. 완성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 때 놓치고 만 시간들, 그 시간 속에 목울대를 울리며 소리쳐 울었던 일이며, 펄펄 뛰던 환희, 그리운 사람, 가슴 뛰던 만남 같은 내 개인사의 편린들을 다시금 현재 시제 위에 풀어놓고 싶다. 그리하여 내 삶의 자취가 진하게 묻어나는 그것들과 진지하게 다시 한 번 이마를 맞대어 앉고 싶다.

살아온 날들에서 요마적의 내 삶을 낯설게 할 작은 빌미나마 끄집어 낼 수는 없을까. 지울수록 되살아나는 것들, 버릴수록 품을 벌리며 오는 것들을 한데 그러모아 그것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떠남은 자신을 낯설게 하기이다. 내가 나를 낯설게 하기 위해 떠나고 싶다. 낯설게 하지 않으면 허물을 벗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으로부터 내가 나를 낯설게 하기. 그래서 허물을 벗고 싶다. 자기성숙을 위해 눈물겹도록 허물을 벗고 싶다. 낯설게 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