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통교는 청계천에 놓인 조선 최초의 돌다리로, 국가상징
거리인 남대문로에 놓여 광화문과 종로, 남대문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다리였다.
14일 아침 10시 20분 KTX로 서울에 다녀왔다.
지인 아들 결혼식이 정동 제일교회에 있어 참석차 갔었다.
그 참에 오랜만에 나들이라, 청계천도 보고 인사동도 들러
하루밤 자고 다음날인 15일 귀부했다.
회색 코크리트에 덮힌 서울 도심에 푸른 물줄기가 유유히 청계천을 흐르고 있다. 개발연대의 상징인 삼일고가도로와 삼일빌딩은 사라졌다. 은빛황혼인 지금, 어린시절 경험했던 전통사회의 삶의 풍경이 모습을 달리하게 된 것처럼 청계천복원사업은 또 다시 서울의 얼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청계천 복원 행사시 눈길을 끈 것은 ‘광통교(廣通橋)’. 보도를 들으니, 태조 이성계 계비(繼妃) 곡산(谷山) 강씨 운운(云云)하는 것. 필자와 같은 성씨에 본이라 관심을 가져왔던 터라 귀에 쏙 들리는 바였다.
14일 오후 4시경인데 토요일이라서 많은 시민들이 찾았다. ‘광통교(廣通橋)’, 한아름씩되는 돌이며, 표지석이, 무언가 예사롭지 않다. 나는 왜 이 자리에 섰을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 씨족(氏族) 강(康)씨(신덕왕후) 무덤 파낸 돌로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 기분이 묘했다. 다시 확인해 봤다. 우리 성씨 본관까지 맞다. 그러면, 과연 무슨 사연이 있길래 신덕왕후 무덤돌을 꺼내 다리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갔다. 자료를 들쳐봤다. 안내판은 간단하게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계천의 석교로 원래 위치보다 상류로 150m 이전하여 원형으로 복원된 다리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광통교는 조선시대 임금이 지나던 길인 국중대로(경복궁~광화문 네거리~종로1가~남대문)가 청계천을 지나는 지점(현 광교 네거리)에 놓인 다리다. 길이보다 너비가 더 넓은 특징을 갖고 있으며, 광통방(넓게 통하는 지역)에 놓였기 때문에 광통교(넓게 통하는 다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현재의 을지로 네거리 바로 북쪽에 있던 소광통교와 구별하기 위해 대광통교라고도 불렸다.
광통교는 태조 때 흙으로 만든 다리였으나 1410년(태종 10년)큰 비가 내려 다리가 쓸려 내려간 뒤 돌다리로 교체됐다. 태종은 당시 정릉(현재 정동)에 있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옛 무덤터에서 병풍석(면석과 모서리돌·처맛돌)과 난간석, 바닥석 등을 모두 가져다 광통교를 재건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태조가 깊은 사랑을 담아 조성한 신덕왕후 무덤돌의 정교한 조각 덕분에 광통교는 예술적 가치를 자랑하게 되었다.
다리를 만들기 위해 왕후의 무덤에서 돌을 가져다 사용한 배경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있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 이성계의 총애를 받았으나,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다 이방원에게 두 아들을 모두 잃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당대 최고의 석공들을 동원하는 등 지극한 정성으로 도성안에 정릉을 조성하고 거의 매일같이 돌봤다. 그러나 1408년 아버지 태조가 죽자 태종은 정릉을 현재의 정동에서 정릉동으로 옮겨버리고 정동에 남아있던 옛 정릉의 무덤돌을 모두 가져다 광통교를 재건한 것이다.
조선시대 광통교는 역사서는 물론 많은 시인·묵객들의 글과 노래에 등장했던 최고의 번화가이자 다리밟기와 연날리기의 명소였다. 그러나 일제 침략과 근대화 과정에서 광통교는 크게 훼손됐다. 1899년에는 남대문로에 전차노선이 놓이면서 광통교 동쪽에 선로가 놓였고, 1930년부터 전차선로가 광통교 위로 옮겨졌다. 1918년 전후에는 광통교 양쪽이 철근 콘크리트로 확장됐으며, 1958년부터 청계천 복개공사가 본격화되면서 난간석 일부만 창경궁으로 옮겨진 채 광통교는 도로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광통교는 2002년 청계천 복원 공사에 따라 44년만에 다시 햇볕을 보게 됐으나, 청계천자문위원회의 결정으로 상류쪽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커졌다. 오는 2010년은 광통교가 세워진 지 꼭 600년이 되는 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더구나 광통교에 사용한 석재가 곡산강씨(谷山 康氏)
'신덕왕후'의 묘자리 돌이라니....
'신덕왕후' 란 누구?
태조의 둘째부인이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본관은 곡산이며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이다. 그녀는 신의왕후 한씨와는 달리 권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조의 집권거사에도 참여했을뿐만 아니라 조선 개국 이후에서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기까지 한다 . 강씨소생으로는 " 1차왕자의난 " 때 방원에서 살해당한 방번, 방석 형제와 경순공주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에 강씨는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1369년 사망후에 신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죽은 후에 태종은 몇차례에 걸쳐 이장을 단행했으며 , 그녀에 대한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2백년뒤인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되고 왕비의 기신제도 복구되었다, 송시열이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 이념을 강조하면서 강씨가 이성계에 의해 정비로 책봉되었을뿐만아니라 정릉이 왕비의 능으로 조성된 점을 일깨웠던 까닭이다.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있는 정릉은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릉동 자리로 정해지게 되었다. 능이 정릉으로 이장된것은 이성계가 죽은 후 태종 9년때의 일이다.
태종이 강씨의 무덤을 여러차례 이장한 것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데 대한 분풀이였다. 태종은 능을 옮긴 뒤에도 정자각을 헐고, 십이지신상같은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드는 등 강씨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때문에 정릉은 현 청계천에 복구될 때까지 2백여년 동안 주인없는 무덤으로 버려져 있어야 했다.
청계천 복원 행사시 눈길을 끈 것은 ‘광통교(廣通橋)’. 보도를 들으니, 태조 이성계 계비(繼妃) 곡산(谷山) 강씨 운운(云云)하는 것. 필자와 같은 성씨에 본이라 관심을 가져왔던 터라 귀에 쏙 들리는 바였다.
14일 오후 4시경인데 토요일이라서 많은 시민들이 찾았다. ‘광통교(廣通橋)’, 한아름씩되는 돌이며, 표지석이, 무언가 예사롭지 않다. 나는 왜 이 자리에 섰을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 씨족(氏族) 강(康)씨(신덕왕후) 무덤 파낸 돌로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 기분이 묘했다. 다시 확인해 봤다. 우리 성씨 본관까지 맞다. 그러면, 과연 무슨 사연이 있길래 신덕왕후 무덤돌을 꺼내 다리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갔다. 자료를 들쳐봤다. 안내판은 간단하게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계천의 석교로 원래 위치보다 상류로 150m 이전하여 원형으로 복원된 다리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광통교는 조선시대 임금이 지나던 길인 국중대로(경복궁~광화문 네거리~종로1가~남대문)가 청계천을 지나는 지점(현 광교 네거리)에 놓인 다리다. 길이보다 너비가 더 넓은 특징을 갖고 있으며, 광통방(넓게 통하는 지역)에 놓였기 때문에 광통교(넓게 통하는 다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현재의 을지로 네거리 바로 북쪽에 있던 소광통교와 구별하기 위해 대광통교라고도 불렸다.
광통교는 태조 때 흙으로 만든 다리였으나 1410년(태종 10년)큰 비가 내려 다리가 쓸려 내려간 뒤 돌다리로 교체됐다. 태종은 당시 정릉(현재 정동)에 있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옛 무덤터에서 병풍석(면석과 모서리돌·처맛돌)과 난간석, 바닥석 등을 모두 가져다 광통교를 재건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태조가 깊은 사랑을 담아 조성한 신덕왕후 무덤돌의 정교한 조각 덕분에 광통교는 예술적 가치를 자랑하게 되었다.
다리를 만들기 위해 왕후의 무덤에서 돌을 가져다 사용한 배경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있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 이성계의 총애를 받았으나,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다 이방원에게 두 아들을 모두 잃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당대 최고의 석공들을 동원하는 등 지극한 정성으로 도성안에 정릉을 조성하고 거의 매일같이 돌봤다. 그러나 1408년 아버지 태조가 죽자 태종은 정릉을 현재의 정동에서 정릉동으로 옮겨버리고 정동에 남아있던 옛 정릉의 무덤돌을 모두 가져다 광통교를 재건한 것이다.
조선시대 광통교는 역사서는 물론 많은 시인·묵객들의 글과 노래에 등장했던 최고의 번화가이자 다리밟기와 연날리기의 명소였다. 그러나 일제 침략과 근대화 과정에서 광통교는 크게 훼손됐다. 1899년에는 남대문로에 전차노선이 놓이면서 광통교 동쪽에 선로가 놓였고, 1930년부터 전차선로가 광통교 위로 옮겨졌다. 1918년 전후에는 광통교 양쪽이 철근 콘크리트로 확장됐으며, 1958년부터 청계천 복개공사가 본격화되면서 난간석 일부만 창경궁으로 옮겨진 채 광통교는 도로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광통교는 2002년 청계천 복원 공사에 따라 44년만에 다시 햇볕을 보게 됐으나, 청계천자문위원회의 결정으로 상류쪽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커졌다. 오는 2010년은 광통교가 세워진 지 꼭 600년이 되는 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더구나 광통교에 사용한 석재가 곡산강씨(谷山 康氏)
'신덕왕후'의 묘자리 돌이라니....
'신덕왕후' 란 누구?
태조의 둘째부인이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본관은 곡산이며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이다. 그녀는 신의왕후 한씨와는 달리 권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조의 집권거사에도 참여했을뿐만 아니라 조선 개국 이후에서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기까지 한다 . 강씨소생으로는 " 1차왕자의난 " 때 방원에서 살해당한 방번, 방석 형제와 경순공주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에 강씨는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1369년 사망후에 신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죽은 후에 태종은 몇차례에 걸쳐 이장을 단행했으며 , 그녀에 대한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2백년뒤인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되고 왕비의 기신제도 복구되었다, 송시열이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 이념을 강조하면서 강씨가 이성계에 의해 정비로 책봉되었을뿐만아니라 정릉이 왕비의 능으로 조성된 점을 일깨웠던 까닭이다.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있는 정릉은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릉동 자리로 정해지게 되었다. 능이 정릉으로 이장된것은 이성계가 죽은 후 태종 9년때의 일이다.
태종이 강씨의 무덤을 여러차례 이장한 것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데 대한 분풀이였다. 태종은 능을 옮긴 뒤에도 정자각을 헐고, 십이지신상같은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드는 등 강씨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때문에 정릉은 현 청계천에 복구될 때까지 2백여년 동안 주인없는 무덤으로 버려져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