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향기가 진동한다. 천연기념물 171호인 ‘제주 한란’이 두 대의 꽃을 피운 것이다. 날렵하고 윤기가 더한 잎에 불그스래한 ‘자한란(紫寒蘭)’이니, 명품인 것이다.
지인 불러 차 한 잔하고 싶은 것이 심정이다. 30여 년 전 나는 난 애호가(愛好家)였다. 그러나 애란인(愛蘭人)은 아니었다. 어쩌다 무려 150여분을 소장했으니, 딴 사람이 생각하면 별난 취미도 가졌었네. 할 것이다. 난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고, 그런 것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일도 없다. 그런 과정에서 다만 ‘물주기 3년이라’는 까다로운 지혜를 터득한 정도이다.
그렇게 우리 집 난은 주인을 잘못 만나 시름시름 아파하면서 거의 다 사라지고(?) 지금은 일곱 분 정도가 아파트와 같이 하고 있다. ‘나도 대엽풍란’ ‘소엽풍란’ 일경구화의 ‘극일품, 자생춘란인 함평산 ‘춘란소심’ 정도다.
지금은 별난 짓을 했구나 하고 생각한다. 무식 속에 사대부(士大夫)가 즐기는 것이란 구전(口傳)만 삼았으니, 무모한 짓이였음이 분명하다. 왜 난 애호가(?)가?, 난에 얽힌 이야기를 하면 글감이 넘쳐 웃지 못 할 일이 많다. 다음 기회 있을 때 기억을 꺼내기로 하고 이것 하나만은 이야기하고 싶다. 85년대 일껏 이다. 난 값이 대단한 고가였다는 것만 말해 두고자 한다. 나의 지기가 난에 홀려 칼라 TV 14인치를 주고, 겨우 ‘녹운(중국 고급)’ 두촉 정도를 바꿀 때 이었으니까......,
난 키우기는 대단히 어렵다. 성패는 물주기에 달려 있다. 아무리 난 전문가라 지칭하는 분도 난을 제대로 키우는 것을 본 일이 거의 없다. 결국은 죽는 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난의 권위자인 이 종석 서울 농대 교수는 그 원인은 애지중지하면서 가까이 두고 물을 많이 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우리 옛시조에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라고 있는 그대로 난은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니다. 한 번 잎이 돋으면 2년에 걸쳐 자라고, 7년가량 낙엽이 되지 않고 살아 있다. 화려하지 않는 소박한 꽃에, 고상한 향기, 변하지 않은 잎, 그리고 부자연스럽지도 힘이 없지도 않은 편안한 곡선, 거기다가 항상 푸른 영구성…….이런 것들이 대체적으로 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한 마디 형용사를 붙이면 “품위 있는 고독”이 바로 난에 잘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마 천이 쓴 ‘사기’라는 책에 공자가 난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의 진가를 전하고 다닌다. 때로는 그 진가가 인정이 되어 벼슬도 하지만. 대부분 인정이 잘 되지 않아 기용이 되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온다. 산을 넘는 길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그윽한 향기가 풍긴다. 주변을 돌아보니 난이 아무도 보지 않은 나무 그늘 속에 혼자되어서 향기를 은은히 발하고 있는 것이다. “아, 저게 바로 나와 같은 것이 구나. 군자는 바로 저렇게 살아야 한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난은 아무도 보지 않은 곳에서 혼자 피어 향을 발한다.
인간은 혼자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자라서 학문을 하고 인격을 수양해서, 그 몸에서 난향과 같은 고상한 향기를 풍길 수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학문이나 돈이나 벼슬을 잔뜩 가지고 있지만, 그 몸 깊은 곳에서 향내가 아니라 썩은 냄새가 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수 있다. 예수가 말 한대로 그야말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제대로 공부한 사람보다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힘과 욕심만으로 출세하거나 부자가 된 사람, 성공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입으로 얻어 들은 풍월로 그럴싸하게 말하지만 몸에서 썩은 냄새가 풍기는 행동을 하는 인테리들이 얼마나 많은가. 입으로는 봉사를, 행동하고는 전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잔뜩 흩어져 있다.
난은 고독한 식물이다. 고독하게 자란다. 사람도 고독하게 자라야 한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성장하는 것이다. 성장해서도 썩은 냄새를 풍기거나 구린내를 피워서는 안 된다. 난처럼 고상한 향기를 뿜어야 한다.
지인 불러 차 한 잔하고 싶은 것이 심정이다. 30여 년 전 나는 난 애호가(愛好家)였다. 그러나 애란인(愛蘭人)은 아니었다. 어쩌다 무려 150여분을 소장했으니, 딴 사람이 생각하면 별난 취미도 가졌었네. 할 것이다. 난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고, 그런 것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일도 없다. 그런 과정에서 다만 ‘물주기 3년이라’는 까다로운 지혜를 터득한 정도이다.
그렇게 우리 집 난은 주인을 잘못 만나 시름시름 아파하면서 거의 다 사라지고(?) 지금은 일곱 분 정도가 아파트와 같이 하고 있다. ‘나도 대엽풍란’ ‘소엽풍란’ 일경구화의 ‘극일품, 자생춘란인 함평산 ‘춘란소심’ 정도다.
지금은 별난 짓을 했구나 하고 생각한다. 무식 속에 사대부(士大夫)가 즐기는 것이란 구전(口傳)만 삼았으니, 무모한 짓이였음이 분명하다. 왜 난 애호가(?)가?, 난에 얽힌 이야기를 하면 글감이 넘쳐 웃지 못 할 일이 많다. 다음 기회 있을 때 기억을 꺼내기로 하고 이것 하나만은 이야기하고 싶다. 85년대 일껏 이다. 난 값이 대단한 고가였다는 것만 말해 두고자 한다. 나의 지기가 난에 홀려 칼라 TV 14인치를 주고, 겨우 ‘녹운(중국 고급)’ 두촉 정도를 바꿀 때 이었으니까......,
난 키우기는 대단히 어렵다. 성패는 물주기에 달려 있다. 아무리 난 전문가라 지칭하는 분도 난을 제대로 키우는 것을 본 일이 거의 없다. 결국은 죽는 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난의 권위자인 이 종석 서울 농대 교수는 그 원인은 애지중지하면서 가까이 두고 물을 많이 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우리 옛시조에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라고 있는 그대로 난은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니다. 한 번 잎이 돋으면 2년에 걸쳐 자라고, 7년가량 낙엽이 되지 않고 살아 있다. 화려하지 않는 소박한 꽃에, 고상한 향기, 변하지 않은 잎, 그리고 부자연스럽지도 힘이 없지도 않은 편안한 곡선, 거기다가 항상 푸른 영구성…….이런 것들이 대체적으로 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한 마디 형용사를 붙이면 “품위 있는 고독”이 바로 난에 잘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마 천이 쓴 ‘사기’라는 책에 공자가 난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의 진가를 전하고 다닌다. 때로는 그 진가가 인정이 되어 벼슬도 하지만. 대부분 인정이 잘 되지 않아 기용이 되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온다. 산을 넘는 길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그윽한 향기가 풍긴다. 주변을 돌아보니 난이 아무도 보지 않은 나무 그늘 속에 혼자되어서 향기를 은은히 발하고 있는 것이다. “아, 저게 바로 나와 같은 것이 구나. 군자는 바로 저렇게 살아야 한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난은 아무도 보지 않은 곳에서 혼자 피어 향을 발한다.
인간은 혼자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자라서 학문을 하고 인격을 수양해서, 그 몸에서 난향과 같은 고상한 향기를 풍길 수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학문이나 돈이나 벼슬을 잔뜩 가지고 있지만, 그 몸 깊은 곳에서 향내가 아니라 썩은 냄새가 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수 있다. 예수가 말 한대로 그야말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제대로 공부한 사람보다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힘과 욕심만으로 출세하거나 부자가 된 사람, 성공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입으로 얻어 들은 풍월로 그럴싸하게 말하지만 몸에서 썩은 냄새가 풍기는 행동을 하는 인테리들이 얼마나 많은가. 입으로는 봉사를, 행동하고는 전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잔뜩 흩어져 있다.
난은 고독한 식물이다. 고독하게 자란다. 사람도 고독하게 자라야 한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성장하는 것이다. 성장해서도 썩은 냄새를 풍기거나 구린내를 피워서는 안 된다. 난처럼 고상한 향기를 뿜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