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殘忍)한 달......,
이처럼 우리에게 유행되고 있는 시의 구절도 드물다.
4월이면 봄이 활짝 핀다. 아지랑이가 끼고, 꽃 봉오리가 지고, 그리고 사람들의 꿈이 부풀어지는......이런 4월을 두고 왜 하필이면 잔인하다고 해야만 하는지 아리송한 얘기다.
그러나 이 말을 사실은 사람들이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잡지에서도 『모든 생명이 절망과 죽음을 뚫고 어떤 곳에서도 무서운 힘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으로 보고 있다. 전혀 얘기가 다르다.『봄은 행동의 신호, 그래서 환멸에 이르게 되고, 따라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불렀다』
사계절 중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 주는 게 봄이다. 그 꿈이 클수록 환멸도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환멸을 적게 느끼려면 희망도 적게 가지면 된다. 그런 줄 알면서도 봄만 되면 사람들의 가슴은 꿈으로 부풀어진다. 감미로운 봄의 속삼임 때문일까. 사람들의 마음을 간질이는 봄의 입김 때문일까.
생각해보니, 잔인한 달은 봄이 이른 서양에서는 환멸(幻滅)로 일찍 오는 모양이다. 그래서 4월이면 이미 환멸의 그늘을 시인에게 안겨주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봄이 늦다. 꽃도 늦다. 아직 부산에서는 화원에서 밖에는 꽃은 보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꽃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아직도 4월은 우리에게는 잔인한 달이 아니다. 당초에 꿈도 희망도 그리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꿈을 크게 갖게 만드는게 별로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도......어디선가 봄의 소리는 메아리쳐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꽃은 없어도 무엇인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까마득한 그날, 자유를 찾아 노도(怒濤)와 같이 거리로 나왔던 시절의 절규(絶叫)가 새삼 귀청을 울려주고 있다.
이제는 들리지 않는 소리다.
그렇다고 4월을 잔인(殘忍)한 달이라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잔인하다고 느끼는 것도 사람이다. 잔인한 달로 만드는 것도 역시 사람이다. 계절에는 아무 잘못도 없다. 4월의 태양(太陽)은 그저 따스하기만 하고, 들은 날로 푸르러 가기만 하는 것이다.
부산의 밤, 해가 서산에 걸치며 부산의 봄은 아지랑이를 밀어 속삭임을 즐긴다. 무슨 이야기일까. 소곤소곤.....비릿한 포구, 낙배는 없고, 돈 풍이 욧트만 동공을 띄운다. 부산의 봄, 이렇게 찾아왔다, 바다소리 향긋하다, 휙^^ 지나간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