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그렇게 밤이 좋다¨

강갑준 2005. 7. 13. 20:55

고요한 숨결속에 깊어만 가는 밤은 한편의 동양화가 된다. 그 속에는 시끌벅적한 생활의 고통소리도 없으며, 수레바퀴 앞의 달걀처럼 위태위태한 순간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입다물고 오직 태고의 고요만이 흐른다.
밤의 장막은 선악, 미추 모든 것을 따뜻한 체온으로 감싸안는다. 밤은 피곤한 노동자에게는 휴식의 안식처를 내어주고 연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장밋빛 보금자리를 주며, 귀가길의 가장을 맞는 가정에는 단란한 꿈을 선사한다.  

하늘이 점지해준 밤은 오롯한 마음으로 오직 인간만을 기다릴 뿐이다. 밤에는 할머님이 구성진 옛 이야기 들을 수 있어서 좋고, 예쁜 아가 소록소록 잠들게 하는 자애로운 엄마의 자장가가 있어서 좋고, 연인들이 소근대는 정겨운 밀어(密語)를 들을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별도 얼어붙은 밤, 노오란 귤을 까면서 옛벗과 정성을 다시 나눔은 긴긴 밤의 한적한 운치요, 따가운 찻잔을 손에 들고 창 밖으로 눈 쌓인 나뭇가지를 보고 살아 있음을 고맙게 확인하고픈 아름다운 한 때이다.

길거리의 행인이 뜸해지고 포장마차의 마지막 손님이 소주잔을 재촉할 즈음 홀로 불을 밝혀 놓고 고인(古人)이 남기고 옛글을 들쳐 봄도 빼놓을 수 없는 밤의 은혜이다. 죽음보다 짙은 어둠이 깔리면서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어느날 밤 문득 정든 옛님이 달빛처럼 찾아주시지나 않을까 하며, ‘동짓날 기나긴 밤 한 허리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너었다가 정든님 오는날 밤이 어든 굽이굽이 펴리라’는 단장(斷腸)의 사랑에 피맺힌 그리움을 토해내는 황진이의 영탄(詠嘆)하는 시조는 가슴을 뒤흔든다.
오매불망 님 그리워 애타는 밤도 있고, 전전반측 잠못 이루는 밤도 있다. 이처럼 밤에는 산비둘기의 서러움들이 처처이 고드름처럼 맺혀 있으며 삭막한 가슴에 저마다의 파란, 노란, 빨간 예쁜 꿈들을 방울방울 부풀게 한다.  

이미지의 단상처럼 산다는 것이 날마다 쾌유되고, 새로이 되며, 자기를 발견하고 회복하는데 있다면 밤은 우리들의 생(生)을 더욱 살찌게 할 것이다. 밤은 낮에 맺힌 한을 가슴에서 붉은 노래로서 풀어낸다. 더하여 낮생활을 대비하기 위한 푸르른 풍요로움을 함께 얹어 준다. 구질구질한 현실의 육중한 삶으로부터 밤은 우리들을 찐득찐득하게 정화하며, 위로의 술잔을 건낸다.

밤은 진정 나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가 있으며, 세월의 언어를 받아들여 자기를 지키며 생을 맥동치게 한다. 아웅다옹살며 생활의 독침으로 파김치가 된 육신에게 밤속의 비수가 우리들을 일깨우도록 밤에는 모두가 아름다운 꿈을 헤아려야 한다.
한밤 지나면 타다 남은 재에서 불기가 되살아나듯 당신의 삶은 성화처럼 훨훨 다시 타오를 것이다. 밤은 정지된 시계처럼 말은 없으나 살아 숨을 쉬고, 시나브로 세월을 일구며 흘러가고 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는 별들만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며 우리들을 유혹하지만, 그나마도 다독거려주는 아늑한 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재삼 알 것이다.

밤은 삶의 충전소요, 낮의 기폭제며 육신의 박카스다. 어둠이 떠나야 새벽이 오고 긴밤의 꿈을 깨야 아침은 기지개로 몸을 세운다. 밤은 메마른 생에 푸르름이 있게하고, 존재의 가능성을 잉태케하여 몸을 푸른 파도로 출렁이게 한다. 이밤이 지나면 나도 더욱 성숙하며 천진한 양으로 다시 태어나야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밤에도 이루어지길 고개 숙여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