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族譜와 秋夕
강갑준
2007. 9. 26. 22:50
중학교 때 일이다.
언제나 수첩만한 책에 정성스레 옮겨쓴 족보책을 품에 안고 다니는 한문 선생이 있었다.
자기 아버지를 섬긴다면 그 아버지가 섬긴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를 섬긴 증조할아버지를 깍듯이 모시게는 게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경조의 마음에서 족보를 아끼게 된다고 그 노(老)선생은 학생들에게 타일렀다. 족보를 품에 넣고 다니는 한문 선생의 생각을 학생들은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비웃었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는 얼굴의 앞뒤에 눈을 두 개 갖고 있었다. 하나는 뒤를 돌아보는 눈이고 또 하나는 앞을 내다보는 눈이었다. 족보는 이‘야누스’신(神)의 뒤에 붙은 눈과 같다. 그 한문선생은 족보를 지니고 다니면 당신의 모든 것을 조상(祖上)이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었다. 학생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 얘기였다. 너무도 앞에만 눈이 팔려지는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족보의 세계는 물론 과거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야누스’의 뒷눈이 앞눈과 한 얼굴에 붙어있는 것처럼 ‘나’의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떼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아무리 앞만 보면서 살겠다고 해도 언젠가는 뒤를 돌아보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족보의 세계에 눌리거나 그것에 업혀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족보속에서 조상의 망령(亡靈)만을 찾는 것과 조금도 다를게 없다.
개중에는 오늘의 나를 위해 족보를 들추는 경우도 많다. 이때에는 순전히 공명(功名)과 허영심(虛榮心)만이 작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게 모두조상을 빛내기 위한 효심(孝心)에서라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 조상과 후손(後孫)과를 알뜰하게 이어주는 것은 단순히 족보는 아닐 것이다. 묘(墓)의 크기는 더욱 아니다.
이래서 차라리 족보의 세계를 등지고 사는 게 마음 편하다고도 한다. 사실은 자기를 지켜보는 조상의 눈이 두려워서인지 모른다. 추석(秋夕), 누구나 족보의 세계를 찾아 성묘(省墓)를 간다. 그러나 조상의 묘 앞에서 읍하면서 과연 몇 사람이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 떳떳하겠는지. 그러나 자손들을 보고 부끄럽잖은 일을 얼마나 했느냐고 떳떳하게 물을 만한 조상을 우리는 또 얼마나 갖고 있는 것일까.
제상에 차린 제수의 초라함보다 그 제상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두 가난한 마음이 더 딱한 계절이다.
언제나 수첩만한 책에 정성스레 옮겨쓴 족보책을 품에 안고 다니는 한문 선생이 있었다.
자기 아버지를 섬긴다면 그 아버지가 섬긴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를 섬긴 증조할아버지를 깍듯이 모시게는 게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경조의 마음에서 족보를 아끼게 된다고 그 노(老)선생은 학생들에게 타일렀다. 족보를 품에 넣고 다니는 한문 선생의 생각을 학생들은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비웃었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는 얼굴의 앞뒤에 눈을 두 개 갖고 있었다. 하나는 뒤를 돌아보는 눈이고 또 하나는 앞을 내다보는 눈이었다. 족보는 이‘야누스’신(神)의 뒤에 붙은 눈과 같다. 그 한문선생은 족보를 지니고 다니면 당신의 모든 것을 조상(祖上)이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었다. 학생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 얘기였다. 너무도 앞에만 눈이 팔려지는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족보의 세계는 물론 과거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야누스’의 뒷눈이 앞눈과 한 얼굴에 붙어있는 것처럼 ‘나’의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떼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아무리 앞만 보면서 살겠다고 해도 언젠가는 뒤를 돌아보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족보의 세계에 눌리거나 그것에 업혀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족보속에서 조상의 망령(亡靈)만을 찾는 것과 조금도 다를게 없다.
개중에는 오늘의 나를 위해 족보를 들추는 경우도 많다. 이때에는 순전히 공명(功名)과 허영심(虛榮心)만이 작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게 모두조상을 빛내기 위한 효심(孝心)에서라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 조상과 후손(後孫)과를 알뜰하게 이어주는 것은 단순히 족보는 아닐 것이다. 묘(墓)의 크기는 더욱 아니다.
이래서 차라리 족보의 세계를 등지고 사는 게 마음 편하다고도 한다. 사실은 자기를 지켜보는 조상의 눈이 두려워서인지 모른다. 추석(秋夕), 누구나 족보의 세계를 찾아 성묘(省墓)를 간다. 그러나 조상의 묘 앞에서 읍하면서 과연 몇 사람이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 떳떳하겠는지. 그러나 자손들을 보고 부끄럽잖은 일을 얼마나 했느냐고 떳떳하게 물을 만한 조상을 우리는 또 얼마나 갖고 있는 것일까.
제상에 차린 제수의 초라함보다 그 제상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두 가난한 마음이 더 딱한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