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가수 조영남씨의 친일
강갑준
2005. 4. 27. 17:40
가급적 시사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려 한다. 그러나 천성이 그래서 그런지 보고 넘기질 못할 일이 생기면 근질근질 또 글을 써야 직성이 풀린다. 나는 라이브러리는 아니다. 그러나 나의 오디오 장엔 그가 모 탤런트와 미국서 결혼한 후, 이화여대에서 기념공연을 한 음반이 꽃혀 있다. 그 음반엔'최진사 댁 세째딸, 세노야, 등 그 시대를 저항하는 듯한 노래가 담겨있어 지금도 즐겨 듣는다. 그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그가 어떻게 친일소리를 뺏어내 우리들 마음을 울적케 하는지..
원래 의상도 제멋대로, 자기 노래 한곡 없이 남의 노래만 불러 힛트한 자유분망자라서 헛소리 한 것일까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선듯 ....,
누드촌에서 살아본 경험담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의 말로는, 바깥세상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누드촌 주민은 성(性)에 대해 무덤덤하다고 한다. 누구나 다 벗고 지내다 보니까 벗은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야릇해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정녕 음탕한 눈은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눈이다.
저 경우와 이 경우는 무엇이 다른가. 누드촌의 알몸이 공개적이고 허용된 광경인 데 반해, 열쇠구멍 너머의 그것은 은밀하고 금지된 광경이다. 바라보는 시선이 야릇하게 바뀌는 것은 대상이 벗었느냐 입었느냐와 큰 상관이 없다. 같은 알몸이라도 금지 여부에 따라 포르노가 되거나 ‘다만 누드’가 되거나 한다. 그러므로 훔쳐보는 즐거움은 어떤 ‘사실’-예컨대 ‘알몸’-에서 온다기보다는 어떤 ‘위반’에서 온다고 할 것이다.
위반은 짜릿하다. 그것도 크게 위반할수록 쾌감도 크다.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은 마음 먹고 그런 위반을 시도하고 있다. 허풍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책 제목은, 저자가 다분히 위반을 위해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어쩌면 그의 진심-스스로는 깨닫지 못할 수 있다-은, ‘위반’을 위해 ‘친일’을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친일을 위해 동원하고 있는 그의 논리는 오류일 뿐 아니라 위험하다. 그는 “전범들도 일본인에게는 조상 아니냐”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두둔하고 있다. ‘전범’을 ‘조상’으로, 공적(公的)참배를 사적(私的) 효행으로, 범주를 둔갑시키는 그의 논리는 교묘한 만큼 음흉하다. 그 말대로 하면, 히틀러를 참배하지 않는 독일국민은 조상도 모르는 후레자식이라야 한다.
또 그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같은 저울 위에 올려놓고, 서로의 입장을 양해하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양만 중재일 뿐, 가해자에게는 가차없는 아첨이요, 피해자에게는 무자비한 폭행이다.
원래 의상도 제멋대로, 자기 노래 한곡 없이 남의 노래만 불러 힛트한 자유분망자라서 헛소리 한 것일까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선듯 ....,
누드촌에서 살아본 경험담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의 말로는, 바깥세상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누드촌 주민은 성(性)에 대해 무덤덤하다고 한다. 누구나 다 벗고 지내다 보니까 벗은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야릇해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정녕 음탕한 눈은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눈이다.
저 경우와 이 경우는 무엇이 다른가. 누드촌의 알몸이 공개적이고 허용된 광경인 데 반해, 열쇠구멍 너머의 그것은 은밀하고 금지된 광경이다. 바라보는 시선이 야릇하게 바뀌는 것은 대상이 벗었느냐 입었느냐와 큰 상관이 없다. 같은 알몸이라도 금지 여부에 따라 포르노가 되거나 ‘다만 누드’가 되거나 한다. 그러므로 훔쳐보는 즐거움은 어떤 ‘사실’-예컨대 ‘알몸’-에서 온다기보다는 어떤 ‘위반’에서 온다고 할 것이다.
위반은 짜릿하다. 그것도 크게 위반할수록 쾌감도 크다.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은 마음 먹고 그런 위반을 시도하고 있다. 허풍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책 제목은, 저자가 다분히 위반을 위해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어쩌면 그의 진심-스스로는 깨닫지 못할 수 있다-은, ‘위반’을 위해 ‘친일’을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친일을 위해 동원하고 있는 그의 논리는 오류일 뿐 아니라 위험하다. 그는 “전범들도 일본인에게는 조상 아니냐”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두둔하고 있다. ‘전범’을 ‘조상’으로, 공적(公的)참배를 사적(私的) 효행으로, 범주를 둔갑시키는 그의 논리는 교묘한 만큼 음흉하다. 그 말대로 하면, 히틀러를 참배하지 않는 독일국민은 조상도 모르는 후레자식이라야 한다.
또 그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같은 저울 위에 올려놓고, 서로의 입장을 양해하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양만 중재일 뿐, 가해자에게는 가차없는 아첨이요, 피해자에게는 무자비한 폭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