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기가 찬다. '추악한 한국인'

강갑준 2005. 11. 11. 10:19

얼마전에 일본에 갔다가 책방에서 「추악한 한국인」이란 책을 보았다. 행여 남이 볼세라 얼른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저자는 김 모. 익히 알고 있는 저자 얼굴이 팽개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고 그 자리에 다시 꼽아 놓았다.

사실 그가 쓴 책은 우리나라의 서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말초신경을 심히 자극하는 내용인데다 문화비교라고 하기에 너무도 어설픈 구석이 적지 않아 워낙 점잖은데다 다른 일로 바쁜 한국의 식자(識者)들께서는 아예 무관심한 듯 초연(超然)할 따름이다.

그가 자칭 비교문화연구자라는 직함을 들고 어찌 그리도 반문화적인 언사를 일삼는지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그의 거짓 섞인 발언에 대해 일일이 참견할 생각도 없지만, 일단 그의 책이 일본대형서점 한켠에 버젓이 자리하여 한류(韓流)에 혐오감을 지닌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으니 어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류는 보는 이마다 입장이 크게 다를 수 있다. 혹자는 한류를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획기적인 문화 사건으로 간주하고 이를 확실한 문화 컨텐츠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국운상승과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가하면 한류는 그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오히려 역효과를 걱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지금의 한류가 과연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한류가 이전과 전혀 다른 형태로 한국을 다른 나라에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야 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바뀐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깨부수어야 한다는 뜻이자, 그럼으로써 ‘우리’가 확대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처럼 ‘우리’를 즐겨 찾는 이들이 있을까? 부모나 친구는 물론이고 심지어 마누라까지 우리 마누라인 우리에게 ‘우리’란 쉽게 깨지지 않는 이데올로기와 같다.

자칭 단일민족으로서 오랜 간난(艱難)의 역사를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정신이고, 부모 자신의 미래는 포기하더라도 자식들만은 잘 난 인물로 만들려고 악착같이 교육시켜 지금의 한국을 만든 것 또한 ‘우리’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렇듯 ‘우리’는 크고 작든 간에 우리를 똘똘 뭉치게 만들어 감히 넘볼 수 없도록 만든 원동력이자 근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우리’가 때로 배타성을 기저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떤 ‘우리’냐에 따라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크게는 우리 민족 역시 ‘우리’이고, 작게는 우리 식구 또한 ‘우리’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 식구가 다른 식구를,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투쟁을 낳는

우리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씨족주의적인 ‘우리’로 어찌 세계화된 ‘우리’를 넘볼 수 있겠는가? 김 모씨가 한국내 조선족과 타국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예로 들면서 우리의 ‘우리’ 정신을 비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의견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 이른바 한류가 극성을 부리는 지금이야말로 유아식의 ‘우리’에서 장성한 어른다운 ‘우리’로 변화 발전할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