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꿈의 제주'가 봄을 침묵하고 있다
강갑준
2007. 3. 17. 08:05
아프리카 초원에서 펼쳐지는 '동물의 세계' 프로그램을 보다 문득 30여년 전 겨울이 떠올랐다. 1970년대 초 지금은 고인인 김춘범형과 함께 겨울산행을 했다. 말이 산행이지 중산간 (송당이라 생각)들녘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돌아온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텐트를 치고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데 오름과 들판 위로 노을이 깔렸다. 그런 정경을 보며 황홀(恍惚)해 했던 젊은 날의 기억을 되새김질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오랫동안 중산간 들판은 그런 곳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이 있겠지만 대부분 마을공동목장으로 이루어져 사유지와는 개념이 달랐다. 누구나 자유롭게 넘나들며 야생마처럼 뛰어 다녔던 공간이었다. 마을공동목장은 전국에서도 제주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특이한 공동재산이다.
여기에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부터 6백여년간 중산간 전역을 목장으로 활용해 왔던 역사적 배경이 담겨 있다. 제주의 목장은 일제시대를 거친 뒤 일부는 시·군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오랜 세월 주민들이 공동으로 목축을 위해 이용해 왔던 기득권(旣得權)을 인정해 마을공동의 소유로 넘겨졌다. 필자의 할아버지 명의로도 약3만평 정도가 있었다.
성행했던 목축업이 쇠퇴하면서 마을공동목장들은 하나 둘 육지부인들에게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대부분 골프장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공동목장을 판 목돈으로 마을사람들이 어떤 의미있는 공동의 사업을 펴고 있다는 이야기는 접해보지 못했다. 때때로 어떤 마을에서는 서로 떡반을 차지하려고 법정다툼이 벌어진다는 풍문을 들을 뿐이다. 수백년간 마을 생업의 터전으로서 조상들이 가꾸며 대대로 물려 주었던 공동목장은 이렇게 사라지고 있다.
가끔 한라산 산행을 할때 서부지역의 오름을 올라보면 동면(冬眠)의 계절에도 잠들지 않는 광활한 공간이 있음을 알게 된다. 파란 잔디로 뒤덮인 골프장이 그것이다. 도민들이 공동목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문제는 이들 골프장 속에 많은 오름들이 고립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골프장에는 많은 농약이 뿌려진다. 오름과 오름을 잇는 들판에 농약들이 대량으로 뿌려진다면 결국은 그 곳을 오가며 서식하던 곤충과 동물들은 발길을 멈추거나 사라지게 된다. 곧 생태의 단절(斷絶)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어디 동·식물에만 해당되는 일인가. 골프장 속에 갇힌 오름들은 더 이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오름을 찾는 사람들을 골프장측은 달가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프장은 '섬속의 또 다른 섬'이 되어 인간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현재 제주도내에는 20개의 골프장이 운영되고 있다 한다. 앞으로 12개의 골프장이 더 들어서게 된다는 보도도 있다. 이들 골프장이 모두 채워졌을 때 제주는 과연 사람들이 살기에 더 나은 땅이 될 것인가.
세계적 환경학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이첼 카슨(RachelCason ; 1907~1964)은 '침묵의 봄'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낯선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내 새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다. 봄이 돌아 왔지만 새들의 지저귐은 들을 수 없고 들판과 숲과 습지에는 오직 침묵만이 흘렀다.'- 터전이 황폐하면 새들만 떠나는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