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바람이 불면 억새는 속으로 운다"
강갑준
2005. 10. 10. 20:47
가을이 하늘을 부른다. 가을의 부름을 받은 하늘은 가을이 깊어갈수록 그 푸르름의 빛을 더한다. 마치 영롱한 바다색만큼이나. 그러나 가을은 들녘의 바다도 키운다. 억새 바다를.
푸른 바다를 할퀴는 파도의 일렁거림을 억새 바다는 회색빛깔의 파도로 말을 한다. 억센 바람에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도 버티는 그들은 거친 환경을 헤쳐온 사람들을 말하기도 한다.
억새는 이맘때 우리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왜 가을에만 억새는 우리에게 다가올까 생각해보지 않았는가. 억새는 우리나라 전역을 비롯, 중국·일본 등지에 퍼져있다는 사실에서 뭔가를 떠오르게 만든다. 동양적 사유(思惟). 그렇다. 가을이면 왜 그리도 가슴이 아파오는지를 억새는 생각하게 만든다. 가을이 모든 사람들을 사색하게 만드는 양, 억새도 가벼운 모가지가 왜 그리 무거운지 고개를 떨군다.
억새는 애초에 붉었다. 붉은빛을 띤 그들은 바람과 가을볕을 맞으며 타들어간다. 붉은빛을 띠던 억새의 머리칼은 시간의 흐름에 못이겨, 하얀 눈이 내리듯 어느새 성성해진다. 하지만 빛바랜 억새라도 떨어지는 해를 맞으면 황금빛을 내는 팔색조로 탈바꿈을 하곤 한다.
10월 금정산은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억새는 속으로 운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속으로 운다는 억새도 바람을 맞으면 달라진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그들은 ‘슥~슥~’ 부딪치다가도 ‘워이 워이’하며 겉으로 숨을 토해낸다.
억새에게 맞는 말은 무얼까. 바람을 이겨내는 생명력이 아닐는지. 생명력으로 친다면 부산사람이나 억새나 매한가지다. 시인 김수영의 ‘풀’이 그런 생명을 말하는 듯 하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부산사람들처럼 생명력을 찾아가는 억새가 ‘풀’속에 있다.
부산 사람들은 정말이지 복을 받았다. 억새로 유명한 경남 창녕군 화왕산의 억새를 만나려면 산꼭대기까지 가야 한다. 1시간 가까이 걸어 올라야만 화왕산 억새 군락지를 볼 수 있다. 금정산은 화왕산에서와 같은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억새는 말한다. ‘아름다움은 때가 있다. 가을의 아름다움은 가을에만 있다’고. 억새의 머리칼이 하얘져 꽃씨들이 흩날리기전에 오라 한다. 가을이라고 사색에 잠겨 침잠하거나, 침묵만 하고 있지 말자. 혼자 그러지 말고, 부산사람을 닮은 억새바다에 풍덩 빠져 사고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