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백두산 천지를 보았느냐?

강갑준 2004. 7. 18. 13:14
나는 행복한 놈이다. ‘행복이 그저 막연해서 딱 무엇이다’고 개념화하기 전에 관념적으로 아무 탈 없이 평상심을 갖는 것이라고 하면, 그저 백두산에, 즐겁게 다녀왔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6월(21-27일), 백두산 일정은 서파, 북파를 등정하고 귀부(歸釜)하는 여행 코스였다.
천지(天池)에서 물을 만나고, 하늘과 맞닿은 맑은 구름을 만나 대화하는 기쁨, 그 순간들, 분명 하늘이 내려 준 복(福)이요, 평생 잊지 못할 추억꺼리이다. 지금도 “백두산의 그리움과 사무침은 여전하다. 그리고 이 무더운 여름밤을 뒤숭숭하게만 한다.” 병일까?


북파(北坡) 천지, 그리고 장백폭포까지를 정리했다. 늦은 감이 다소 있으나, 동행한 ‘백두산 촬영팀’의 사진 작품들이 생생하게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되었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크게 도움을 얻었을 것이다. 이 기회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백두산 사진들은 힘든 인내의 역작들'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생각케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사진 정리가 끝나는 대로 2, 3회 더 ‘백두산 들꽃, 조선족들의 삶의 모습, 연변의 발전상’ 등을 모아 documentary로 엮을까 한다.


하늘 아래 첫산 ‘백두산’ 한가운데 ‘하늘 연못’ 태고의 물속엔 또 하나의 하늘이 들어앉아 있다. 울울창창 산림을 지나면 야생화가 꽃대궐을 이룬 ‘산마루 평원’ 길이 1,250m '승하사'끝엔 웅장한 ‘장백폭포’. 천지에 오르면 한반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백두(白頭)의 준봉 가운데 하나인 천문봉에 오른다. 한가운데 펼쳐진 아득한 천지. ‘하늘 연못’을 향해 읍(揖)하고 있는 40여개의 신령스런 봉우리들. 무서우리만치 맑고 푸른 태고의 물은 하늘과 맞닿아 있다.


한순간 천지 물에 서기가 어리며 숭엄한 반영(反影)이 찬란하게 떠올랐다. 기슭마다 만년설을 늘어뜨린 백두 연봉과 하늘의 구름이 잠시 천지로 내려와 몸을 씻는듯.


그러나 천지는 자신의 모습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백두산의 날씨는 시시각각 변하고 쾌청하게 맑은 날은 1년에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는다. 불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능선을 넘어온 구름이 비를 뿌리며 까마득한 천지 벼랑으로 휘감겨든다. 짐승소리로 울부짖는 흑풍(黑風). 이제 보이는 것은 안개와 구름과 이를 휘젓는 바람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10여분. 방향을 바꾼 바람이며 안개와 구름을 말아올리면 천지가 떠 한차례 기막힌 변용으로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색으로, 푸른색으로, 옥색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모습을 바꾸는 숨바꼭질 때문에 백두산을 찾는 사람들은 몇분 차이로 희비가 엇갈린다. 백두산에서 ‘천지를 보았느냐’가 인사말이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북한과 중국의 경계인 백두산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는 만물상을 이루고 있다. 가장 높은 주봉은 2,750m의 장군봉으로 한반도에 속한다. 주요 봉우리는 향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제비봉, 천문봉 등. 비루봉 아래 북한 6호 경계초소는 맑은날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은 험한 바위에 둥지를 튼 칼새(제비와 비슷한 새)뿐. 우리의 백두산을 우리땅에서 오르지 못하고 중국을 거쳐 올라온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고 기도하고 합창하며 안타까움을 달랜다.


흰눈이 녹아내린 백두산의 풍경은 더욱 볼 만하다. 이도백하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고원지대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미인송 소나무. 지프를 타고 오르는 천문봉의 꼬불꼬불한 포장 산악도로 옆으로 바람에 쓰러질 듯 울창하게 서있는 사스레나무. 이곳에서 거센 칼바람을 이겨내다보니 잣나무는 누운잣나무로 지작나무는 사스레나무로 별종이 되었다.


수목한계선인1,800m 높이에 이르면 키를 다투던 나무들이 자취를 감추고 화산암 돌가루가 널려있는 산마루 평원이 나타난다. 노란만병초, 하늘매발톱꽃, 좀참꽃, 두메양귀비 등 온갖 야생화를 볼 수 있는 초원. 광활한 초록의 융단에 납작 엎드려 바람을 피하는 노란만병초 군락이 장관을 만들어낸다. 호랑나비, 신선나비 등 고산나비떼가 한가롭게 꽃대궐의 향기를 쫓는다.


천지의 물이 흘러 나가는 곳은 오직 한군데. 천지 북쪽인 천문봉과 차일봉 사이에 있는 달문이다. 천문봉과 달리 산허리로 난 좁다란 돌계단을 따라 걸어서 오르는 코스. 얼음처럼 차가운 천지 물을 손으로 떠 마신다.


백두연봉에서 보면 천지는 거울같이 고요한 호수이지만. 달문 천지 호반에 발을 적실때는 약동하는 생명 그 자체이다. 검푸른 심연에서 쉴새없이 물결이 일어나 바위에 부딪쳐 안개를 토한다. 거대한 용오름이 하늘로 이어지기도 한다. 달문에서 장백폭포에 이르는 1.250m의 내는 승하사. 물의 양은 많지 않지만 흐름은 하얗게 부서질 정도로 세차다.


승하사는 통천문(通天門)에 이르러 거대한 장백폭포로 쏟아져 내린다. 낙차가 68m에 이르는 장대한 폭포는 온통 물보라를 흩날려 칠색 무지개를 띄우며 백두산턱에 걸려있다. 폭포 주변에도 군데군데 만년설이 누워있다. 폭포의 물줄기는 빙하가 빚어낸 이도백하 골짜기를 따라 송화강의 원류가 된다.


폭포 아래쪽 개울에서는 섭씨 82도짜리 중탄산나트륨 온천이 솟는다. 이 온천들은 마치 용이 입김을 뿜는 것 같다고 해서 취룡(聚龍)온천이라고도 부른다. 김이 하얗게 솟아 오르는 노천온천 곳곳에서 온천물에 익힌 삶은 계란을 판다. 천지 속에도 한겨울에 더운 기운에 피어올라 얼지 않은 호반은 세곳이나 있다.


백두산은 설악산이나 한라산, 지리산처럼 아기자기하게 아름다운 산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백두산은 단순한 산의 의미를 넘어선다. 한민족의 발상지로 숭배되는 민족의 조종산(祖宗山). 천지 너머로 여러 준봉들이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을 이루며 힘차게 내달리는 모습을 한 눈에 볼수있다.


천지는 바로 백두산이 뿜어내는 민족정기의 원천. 천지물은 지하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흘러간다. 화산과 빙하. 검은 돌과 하얀 물길. 만년설과 봄꽃, 시린 물속에서 솟는 온천수, 그 상극의 조화가 상생과 화엄으로 우리를 끌어 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