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아득한 추억들이 안개 깔리듯

강갑준 2004. 10. 5. 23:32
‘글과 'D-photo' 스케치’
10월3일, 봄에 이어,악양 최참판댁과 남해 가천리 다랑논, 그리고 순천만을 다녀왔다. 넓은 평야, 그리고 옥빛 바다 다랑논 굴곡의 절묘한 어우러짐, 넒은 순천만 갯벌이 주는 메시지를 담을 nostalgia의 시간이었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간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세상은 급변하고 나 또한 하루하루를 워낙 바쁘게 지내다 보니 도대체 지금 내가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조차도 모를 지경이다. 꽃이 피었는가 싶더니 그 꽃이 진 지도 이미 오래, 날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무감각할 정도로 시간이 쉼 없이 흘러간다. 어떤 때는 더럭 겁이 나기도 한다. 나는 여기 가만히 있는데 시간만 저 멀리 혼자 가 버리는 것 같아서…….


간밤 무서리에 온몸 진저리치더니 코스모스 꽃잎이 눈부시다. 간밤, 창을 때리는 밤에 무슨 잎들이 떨어졌을까. 가을이 깊어 갈수록 사람이 그립다. 오늘은 누가, 어떤 것들이 세상을 뜨는가. 한세상을 환희 밝히고 홀연 떠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계절, 눈으로 그대를 부른다.

“하얀 메밀꽃 피었네.”

이효석이 ‘소금을 뿌린 듯하다’고 묘사한 봉평 메밀밭이 하동 최참판댁 물레방앗간 앞에 3평정도 공간에 심어 눈길을 끌고있다. 좀 얌체스럽다 할까, 관광객 유치를 위한 잔꾀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좀더 볼거리 제공의 연출이었으면 한다.


‘최참판댁’도 박경리의 소설‘토지’의 주 무대이다. 논픽션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아는지, 그저 한번 들러 보고 ‘그저 그렇다’는 정도로 느끼며 떠나는 것 같다. 그러나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평사리 들판에는 어느 높은 분(?)의 한마디에 매년 허수아비 축제가 열린다 한다.


그 행사 준비를 위해 나온 어느 공무원은 ‘쓸데없는 짓한다. 는 주민들 볼멘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매년 열리고 있다고 불평이다. ‘큰일 났다’ 생각이 든다. 치적위주로 탈바꿈하는 볼썽스런 행정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눈앞이 캄캄해 온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로 유명해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강으로 꼽히는 섬진강을 따라 지리산 자락이 멀찍이 물러나 앉으면서 이루어 놓은 너른 벌이다. 중국의 악양과 지형이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박경리는 통영(옛 충무)에서 출생 진주 여고를 졸업했다.


그는 이곳 평사 리를 잘 알고 있었고, 또한 1970년대 암선고를 받았는가 하면 사위 김지하의 정치적 고난을 경험해야 했다. 토지는 이 같은 개인적 시련과 사회 역사적 아픔에서 배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토지’는 만석꾼 대지주 최참판댁의 마지막 당주인 최치수와 그의 고명딸 서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토지의 상실과 회복을 둘러싼 대하드라마이다. 작가 박경리는 1960년대의 어느 날, 화개의 친구 집을 방문하는 길에 악양 무딤돌을 보고 당시 구상하고 있던 토지의 무대를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을 집필하는 도중 평사리는 답사하지 않았다. 소설속의 실제의 평사리 모습 같지 않은 것도 이 때문 이다. 하지만 토지 속의 최참판댁은 평사리에서 2.3km 떨어진 정서리 상진마을에 소재한 ‘조부자집’의 가족사와 너무나 흡사하다. 조부자집은 현재 본채는 없고 행랑채와 전통 연못이 예날 그대로 남아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악양들의 옥답과는 달리 산 쪽으로 다가앉은 마을에는 유난히 돌이 흔하다.


거의 모든 집의 담이 돌로 되어 있음은 물론 마을 뒤편 다랑이논의 논둑 역시 돌을 쌓아 만들어 놓았다. 언덕배기에는 단감나무와 밤나무 밭으로 일궈 땅밖에 모르는 농부들이 박토를 일구며 흘린 땀을 짐작케 한다. 마을 한 가운데는 소설속 임이네와 강천택, 두만네, 막내딸 등 아낙들이 시름을 털어 놓거나 신세를 한탄하는가 하면 작은 일로 아웅 대기도 했을 공동 우물과 빨래터가 남아있다. 또 지난 80년대초 방영된 대하드라마 토지의 상징 위민정(慰民亭)팽정나무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볕은 뜨겁다. 새를 풀어 놓는 바람, 새를 쫓는 허수아비, 비로소 들녘이 너를 품에 살아 있는 것들을 풀어 놓고 축제를 벌인다. 날마다 열매를 익히는 굿판,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하는가. 바람난 사회의 바람을 맞는 사람들, 꿈을 버린 곳도 모른 채 흘러가는 사람들, 그 버려진 꿈은 이 가을에 어디서 쓸쓸히 익어 가는가...,


산자락 층층…….다랑논 곡선 아름다웠다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된다. 어느 지인의 홈피에 아직 이른 다랑논의 정경이 올려져, 추석 전후가 적기일 것 같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늦은 듯 했으나 나선 길에 찾아 갔다. 그러나 구부러지고 휘어지며 이루어 내는 논두렁의 아름다운 굴곡, 마치 멀리서 보면 층층이 계단을 이룬 것처럼 보인 다랑논은 가을걷이가 끝나 아낙들의 마늘 심기가 한창 이었다. 아직도 기계의 힘의 미치지 못하는 산골짝이나 비탈이 심한 바닷가에서 더러 만날 수 있는 풍경이 계단식 논인데 홍보가 잘 돼서인지 사진가들의 풍경을 담으러 많이 찾아 드는 명소로 소문이 나 있다. 지금은 추수 마무리 불을 놓아 태우는 연기와 굴곡의 절묘한 어우러짐을 만날 수 있는, 필자가 본 바로는 이곳이야말로 아름다운 다랑논의 극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먼 산 능선 타고 내려오는 가을, 들녘 가득 여름이 흘린 땀을 금빛으로 담금질한다. 낮선 것들에 밀려 하나둘 사라지는 정겨운 것들, 달은 차오르는데 마음은 야위어만 간다.

은빛 일렁이는 순천만 가을 추억 담는다.

이 가을 순천만으로 가보라. ‘안개 나루’다 안개가 걷히면 조금씩 속살을 드러내는 갈대밭은 아스라한 가을 추억을 만들어 내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안개는 만날 수 없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안개가 자욱한 아침의 순천만을 읽은 기억을 되찾아 본 것이다. 은빛의 갈대밭, 그 갈대밭 사이로 뱀처럼 구불거리는 물길, 물길과 갈대밭 위로 비친 저녁노을 환상적인 어울림은 김승옥의 소설보다 더 짙은 감동을 준다.


무룡마을 야산에서 바라보는 일몰 광경은 또 숨 막히는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 바닷물이 모두 쓸려 나간 썰물 때라면 ‘고요하게 살아 있는 순천만의 모든 생물들, 그들의 꿈, 삶의 지혜들’을 속속들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통통배가 물살을 가르며 갈대밭 숲을 비집고 들어가면 흑두루미, 검은머리 갈매기 등이 놀라 후드득 날갯짓을 한다.

바다 쪽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면 갈대는 줄어들고 또 하나의 세상이 나타난다. 짙은 쪽빛의 바다이다. 순천만 갈대밭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일몰과 새벽안개를 환상적으로 모두 감상하려면 천상 그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할 것 같다.

싸늘한 미소, 파랗게 질린 하늘, 가을은 눈 빛아래로 풍경을 바꿔 놓았다. 찬이슬을 머금은 차가운 입맞춤, 먼 곳서 달려와 먼 길을 재촉하는 바람, 이별 예감에 나무들 몸떨고, 가을 손길 닿는 곳마다 비어 가는 숲, 늦더위 미련 남아 텅빈 햇살, 텅빈 하늘, 미처 못 지운 추억 하나. 낮달로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