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일본 도쿄 삼촌을 만나

강갑준 2005. 11. 24. 23:28
도쿄를 찾은 날은 11월 2일이었다. 아침나절 맑은 햇살과 공기 그 자체가 신선한 연두 빛이다. 가슴 가득 연두빛 햇살과 공기를 호흡한다. 나의 몸에서도 연두빛 싹이 나려는지 근질거린다.

바쁘게 서둘러 2일 오사카에서 신간선‘노조미'를 탔다. 목적은 ‘동경에 꼭 한번 다녀가라’는 삼촌님 말에'예,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만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아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던 차, 오사카 에 갈 일이 생겨, 이번 기회엔 '꼭 갑시다’는 가족의 권유와 또 작년 한국을 50여년 만에 방문하고 귀국하여 고인이 된 고모부의 묘소도 찾아 봐야겠다는 마음에서 나선 것이다.

나의 삼촌 송상두는 금년 70을 넘었다. 부산서 태어나 부산중-고등학교를 나온 수재, 삼촌들 친구를 보면,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근무한 이채주씨, 고 김정부 검사 등 이름난 친구가 많다. 한국에 살고 있으면 한 자리는 할 양반이었다.

그러나 약 50년전 고등학교를 졸업후 바로 일본으로 건너 갔다.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한후, 삼촌 이야기 대로라면‘ 민족'을 위해서 청춘을 바친 일꾼이다.’ 지금은 이런 사실을 쓰지만 과거에는 엄두도 못 냈었던 시절도 있었다. 만시지탄이란 말이 맞을 까 모르겠다.

고모부는 평양 출신으로 일본에서 자수성가로 총련이 발행하는‘조선신보'사장을 역임 한 분이다. 그런 분이’고국이 그리워 지난해 국적을 바꾸고 한국에 오셨다 갔다. 놀랄 이야기는 불편한 몸을 한 채, 경주 불국사를 찾고, “아^ 아^신라의 달밤이여”라는 노래를 구슬프게 불러 ‘조국이 하나’라는 것을 느낄 만큼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새롭다. 일본에 가서 몇 개월 후 돌아가셨다.

고모부의 딸인 이양희는 일본 조선 대학교를 나온 수재로, 또 김일성 가극단에 도 일한 경력을 가진 미인. 그의 신랑인 전씨(이름은 밝히지 않겠다.)라고 하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그의 부친인 교포 1세의 사업을 이어받아 파칭코, 음식업 등 사업으로 돈을 많이 모은 젊은 재력가라 한다. 예로 음식점서 사용하는‘김치' 닭 등을 전남 순천에 공장을 세워 물건을 갔다 사용할 만큼 고국에 대한 애정도 대단하다.

삼촌은 신간선이 도착하는 도쿄역에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내일(3일) 일정에 맞추어 가까운‘우에노'공원 곁의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한다. 우린 여정을 풀고 다음날 1시30분경 고모부 댁을 찾아 나섰다. 원래 나는‘길치’라서 약 1시간 정도 가는 길이 어느 곳으로 가는지 방향감각을 잃고 전철에 의지한채 지루함을 느끼게 했다.

한참 후 전철역에 고모부 아들이 마중나와 고모부 님 댁에 들렀다. 차 한 잔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고모부(조선 신보 사장) 묘소로 갔다. 꽤나 묘소까지는 멀어서 1시간 정도 걸렸다. 저녁 5시경도착, 묘소는 동네 한복판에 있었다.헌화 한후, 묘원을 나왔다.

이양희가 운영하는 사업장 파칭코를 둘러봤다. 500명이 자리한다고 말한다. 만원이었다. 장사는 잘 되는 것 같았다. 그 건물은 자기 것인데 영화관도 보였다. 4층으로 올라가‘모란봉'이란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15 평정도의 룸에 메뉴가 준비되 있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서로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우며 노래도 하고, 사진도 찍고, 즐거운 만남의 합창도 하고, 그리고 오후 10 시경 우리는 서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배웅을 받으며 우에노’숙소로 돌아왔다.

귀국 후 이 홈페이지를 통해 고마운 정을 전하려고 했지만. 뒷뚱거리는 체력의 탓인지,건강이 좋지 않아, 오늘이야 안부를 전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그리고 고모님 아들 ‘이 선생님, 사진 작가 허 선생님, 게다가 양희씨 딸인 귀여운 조카 등 매우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나의 삼촌을 만나..
“그렇게 나이든 모습만 뵈어도 마음이 잔뜩 숙연해지면서 서러워 집니다. 항상 건강에 유념하시고 숙모님과 다복하게 지내시기를 우리 가족은 바라는 바입니다.
어떤 기회가 오면, 양희씨 가족, 그리고 고모님 가족 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