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저만치 인생의 끝이 보이네요
강갑준
2007. 5. 26. 12:12
인생의 허무함을 느낍니다. 아침신문에 ‘피천득 선생님’의 부고 기사를 읽었습니다. 담백한 글과 함께 단아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어쩐지 가슴에 맺히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어쩐지 가슴에 맺히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인생은 도대체 무엇일까?’
막연한 허무감, 많은 사람들의 생에 대한 고민의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듭니다.
시인 ‘롱펠로우’도 ‘슬픈 곡조로 내게 말하지 마오. 인생은 허무한 꿈이라고’ 읊었지만,
따지고 보면 텅 빈 꿈같은 것이 인생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인은 허무한 꿈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두번쯤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허무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막연한 허무감, 많은 사람들의 생에 대한 고민의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듭니다.
시인 ‘롱펠로우’도 ‘슬픈 곡조로 내게 말하지 마오. 인생은 허무한 꿈이라고’ 읊었지만,
따지고 보면 텅 빈 꿈같은 것이 인생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인은 허무한 꿈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두번쯤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허무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불교가 인생의 큰 매력이 되는 것은 인생을 허무하게 봤기 때문인 듯합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첫머리에 나오는 말로 ‘삼라만상이 텅 빈 것 같구나’라든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도 아주 기막히게 매력적인 말입니다.
옛날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시조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리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고 했을 때,
오래 피어 있지도, 오래 푸르지도 못하는 화초의 운명에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여
생을 허무하게 파악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전도하는 사람들이 다니면서 부르던 노래 중 ‘허사가(虛事歌)’라는
노랫말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고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門前沃畓)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춘몽”
이 말에 대해서 반박할 만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이는 왜 사느냐고 물으면, 어쩔 수 없이 산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아이들 때문에 산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돈 때문에 산다고 합니다. 감투 때문에 산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감투 때문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어디까지 나의 주관이니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감투를 쓰면 자기 자신의 머리 사이즈를 보고 좀 어울리는 감투를 써야합니다.
감투는 큰 게 좋다고 해서 머리는 조그만 친구들이 큰 감투를 쓰니 쑥 내려가 눈은 물론 귀까지 가려져 보지도 듣지도 못해 인생을 점점 괴로운 고비로 몰고 가는 꼴을 보게 됩니다. 지금 시중에 나도는 말 가운데 ‘권력형…’이란 말이 있지만, 이것을 민중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정당하게 장사하고 돈 번다면 누가 나무라겠습니까. 감투만 벗으면 인생이 허전해서 두문불출, 다시 감투를 쓰기까지는 누구도 만나려고 하지 않는 이런 풍토는 하루빨리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사실 감투는 자신이 쓰는 데만 취미를 붙여서는 안 되고 척 벗어서 다른 사람 머리에 올려놓고 그걸 바라보는 멋도 있어야지, 최후의 일각까지 저 혼자 쓰겠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못됩니다.
신라의 고분들이 저렇게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속의 주인공들이 돌아가실 때만이라도 그 왕관을 벗어놓을 것이지, 돌아가면서도 그냥 쓰고 들어가니까 그 왕관을 훔치려는 무리들에 의해 고분이 성치 않다고요. 죽어도 편안하지 못한 거지요. 이 감투를 쓱쓱 벗어서 좀 시원하게 살 것이지…. 이런 것들이 다 인생의 문제꺼리가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쓸 이야기가 많지만 다음 기회에 다시 쓸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