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죽백(竹帛) 드리우다
강갑준
2006. 4. 10. 17:54
내가 경주를 처음 만난 것은 ‘석양’ 이라고 하는 상허의 단편소설을 통해서였다. /봉긋이 흘러내리는 오릉의 능선을 호젓이 바라보던 주인공 매헌의 머리위에서 “정말로 니힐하죠?”하는 소리가 났다./그가 기대섰던 소나무 위에 올라앉아 책을 읽던 여 주인공이 매헌을 발견하고 한 말이었다.
고등학생때의 감수성으로 그 한마디에 끌린 나는 그후 경주에 들를 때마다 오릉을 순례지처럼 찾게되었다.담장으로 막히기 전에는 가끔 무덤곁에 앉아 편안히 쉬기도 했다. 누워서 책을 읽을 때엔 선인들의 숨결이 바람결로 스침을 느끼기도 했다. 반월성지도 내 순례지의 하나다. 자취없이 사라진 궁성, 그 빈터, 세월에 쓸려 이제는 흘러간 옛날, 내게 있어서 반월성에 서 있는 것은 그대로 역사 위에서 있는 것이고, 그 잔디위에 눕는 것은 사라진 꿈을 베고 눕는 것이었다.
반월성지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음의 허무함이 마음을 더 끌어서, 경주에 가면 거의 반드시 들르는 곳이 되고 말았다.경주는 내게 있어 니힐한 곳이었고, 것이었다. 장려한 무덤들의 그 몸뚱이만큼 커다란 허무는 더없는 경주의 매력이었다. 안압지, 포석정도 그렇지만, 이제는 발길이 향해지지 않는 불국사, 석굴암까지도 내게는 허무의 덩어리였다.
경주는 허무이자 동시에 초현실이다. 과거와 오늘이 혼재되어있고, 삶과 죽음이 함께 숨을 쉬는 곳, 납작한 지붕머리로 보이는 산채만한 무덤이 자아내는 풍경은 그대로 큰 현실 풍경이다. 역사와 현실이 한 공간에 부딪히고 얽히어 일구어내는 소리, 나를 부르는 경주의 목소리, 그 엄청난 크기에도 불구하고 그 무덤들은 때로 우리 할아버지 무덤처럼 자그마하고 따뜻하다. 황소처럼 순진하고 듬직하다.
경주사람들은 누구나 다 역사속을 사는 사람들 같다. 오늘을 살아도 어제를 사는 사람들, 무덤 사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림속의 인물처럼 생활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미니 스커트 입은 아사녀를 찾아 담배연기 휘날리며 차를 모는 청년아사달, 개나리 한송이 머리에 꽂고 뛰어 노는 선화공주들,
사진은 원래 그 자체로 초현실적인 매체이다. 과거가 현재로 살아있고, 현재가 과거로 퇴색하는 종이조각, 산 채로 죽어, 죽어서 살아있는 영혼, 마법의 환상,
내가 경주를 찍는 것이 이 때문이고, 경주를 찾는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또 경주를 아직 찍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내일 경주를 다시 찾아야 겠다 싶은 것 또한 이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