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한라산을 찾아서(2)

강갑준 2007. 5. 23. 08:17




이제 겨우 5월 중순일 뿐인데 염치도 없이 여름이 슬며시 기웃거리고 있다. 사실 날씨로만 보자면 이미 여름이나 다름없다. 한달은 더 버터야 할 봄이 실종된 것이다. 잃어버린 봄을 찾아 진달래가 물들기 시작한 한라산을 지난20일오전 10시30분 비행기표를 겨우 얻어 진달래 군락지인 선작지왓을 돌아보고 21일 오후6시50분 비행기편으로 돌아왔다.

지금 한라산 선작지왓은 하늘과 맞닿은 듯 온통 불바다이다.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재앙의 불길이 아니라. 붉은 진달래꽃이 연출하는 환상의 꽃불이다. 전국의 진달래 명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은 제주 한라산이다. 그런데도 진달래의 개화는 가장 늦다. 정상의 해발 고도(1950m)가 남한에서 가장 높기 때문이다. 광활한 진달래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는 선작지왓, 윗세오름 일대는 해발 1600~1700m에 이른다. 한라산에는 영실, 어리목, 성판악, 관음사 등 4개의 등산코스가 개방되어 있다.

그중 영실코스는 정상을 밟아볼 수 없지만, 진달래 군락지를 감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달래꽃을 보기 위한 산행이라면 영실쪽으로 올라갔다가 윗세오름대피소를 거쳐 어리목쪽으로 하산하는 것이 최적의 코스인 것 같다. 영실코스의 산행 기점인 영실휴게소는 해발 1280m이다. 이 코스의 초반부에는 아름드리 활엽수들로 울창한 원시림을 지나게 된다. 등산로 주변에는 제주도에 흔치 않은 적송 고목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위세로 늘어서 있다. 해발1400m대부터 급경사의 숨가쁜 돌계단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하지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면, 한라산의 너른 품에 안긴 오름들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오백 나한’으로도 불리는 영실기암 너머에는 제주 남서부해안과 서귀포 바다가 아스라이 보인다.

해발 1600m대에 이르면 침엽수 특유의 향기가 진동한다. 우리나라 최대의 구상나무 군락지에 들어 선 것이다. 구상나무는 지구상에서 오직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특산식물인데, 특유의 진한 향기를 맡으면 머리가 금새 맑아지는 듯하다.

구상나무 숲 터널을 빠져나오면 갑자기 시야기 훤히 트인다. 고산평원인 선작지왓에 들어선 것이다. 선작지왓은 ‘큰돌이 군데군데 서 있는 넓은 들’이라는 뜻이 제주도 방언이다. 그 한 복판에는 윗세오름의 봉긋하고, 뒤쪽에는 한라산 정상을 이루는 백록담이 불끈 치솟아 있다.

선작지왓 평원에는 해마다 5월 초순경부터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한다. 그 뒤를 이어서 5월말쯤에는 핏빛보다 더 붉은 철쭉이 장관을 이룬다. 거무튀튀한 백록담의 암벽과 대비를 이뤄서인지, 진달래꽃 빛깔이 유달리 붉다. 그리고 어느덧 한라산의 주인으로 자리잡은 야생 노루가 진달래밭에서 뛰노는 광경은 사뭇 감동적이고 경이롭다.

선적지왓을 가로지르는 등산로 옆에는 물맛 좋기로 소문난 노루샘이 있다. 거기서 윗세오름대피소까지는 지척이다. 한라산 진달래는 봄의 대미를 장식하는 꽃이다. 봄날의 끝자락을 벌겋게 수놓는 진달래꽃이 모두 스러지고 나면, 계절은 뜨거운 여름철을 향해 숨가쁘게 내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