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매형(梅兄)에게 미안하다"
강갑준
2007. 3. 23. 20:38
‘3월이 오면 꼭 가야지’하며 벼르던 남도 탐매(探梅)를 나서기로 한 것은 봄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2월 초부터였다. 가끔 선암사에 전화를 걸어 매화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꽃샘추위 탓에 동해(凍害)를 입어 꽃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식을 받곤 했으나. 확인도 할 겸 나서기로 한 것은 지난 22일, 새벽4시경 주섬주섬 챙겨 출발을 했다. 꼭 오늘은 선암사(仙巖寺), 송광사(松廣寺), 화엄사(華嚴寺) 관매(觀梅)길에 나서기 전.....,
‘버지니아 울프’가 생각난다. 오늘같이 화창한 봄날, 울프는 남편에게 산책을 다녀오겠다는 짧은 글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 지팡이와 모자를 강가에 두고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집어 넣은 채 강물로 뛰어 들었다……. 하지만 나는 회색빛 암울한 겨울을 견뎌내고 고개 내미는 새싹에서 희망을 배우고, 찬란하게 빛나는 저 태양에서 삶에 대한 열정을 배우며, 화려한 꽃향기를 담은 바람에서 삶의 희열을 배운다. 그러나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 두뇌의 자연적 노쇠현상이 겹쳐 가면서. 가고 싶은 곳을 가끔 잊어버리곤 한다.
탐매길 에 나선 것은, 우리나라 매화 중에 역사를 간직한 곳이 이 곳 들이라고 매화에 관한 책에 소개돼 있다. 간략하게 적으면, 순천의 조계산 선암사에는 수령 620년생의 백매와 550년생의 홍매를 비롯하여 200년생에 이르는 백매와 홍매 등 23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우리나라 정매(庭梅)의 진수를 맞볼 수 있는 곳이라는 것과 그리고 승주군 송광사 종고루밑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대웅보전 앞에는 수령 약500년 된 우람한 매화나무(白梅) 등등이다.
필자가 매화를 좋아한 이유는 이렇다. ‘매화는 그 성품이 곧고 냉철하며, 흑심(酷甚)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도 투철한 정신과 강인함으로 흐트러짐 없이 견디며, 굽힐 줄 모르는 절개와 지조(志操)와 따뜻한 가슴이 있기에 아름다운 미소를 지닐 줄 알고, 영혼을 맑게 하는 청향(淸香)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5년간 매화를 찍었지만, 진정 매화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
매화는 수많은 문인들이 노래했듯이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섬섬옥수(纖纖玉手)와 같은 청옥(靑玉)과 댕기머리 규수(閨秀)의 볼연지(臙脂) 꽃빛으로, 한지(韓紙) 창살문에 투영(投影)된 서기(瑞氣)어린 모습도 좋지만, 빙골(氷骨) 옥자(玉姿)와 고아(古雅)한 품격, 누속(陋俗)을 벗어난 미감(美感)이며 청빈(淸貧)한 절사(節士)의 절의(節義)를 품고 초고(超高0하면서도 정결(貞潔0함이 깃든 그 정신을 더욱 아 아끼고 소중히 여겨야 할 줄로 안다.
매화를 사랑한 예 어른들은 많다. 우리들 기억 속에 그래도 잊어지지 않은 “퇴계의 매화” 이 봄이 가기전 매화를 노래할까 한다.
퇴계 이황(李滉)은 나이 70세가 되던 선조3년(1570년) 음력12월 8일 유시(酉時. 저녁6시경)에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은 다음 그대로 평상시의 모습을 한 채 운명하였다. 그의 방 윗목에는 그가 애완하던 매화분이 놓여 있었고, 금방 향기를 터뜨릴 듯이 두 세 개의 꽃망울이 부풀어 있었다.
퇴계는 숨을 거두기 몇 시간 전 그날 아침에 자기 옆에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저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하였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매화에 물을 주도록 한 사실은 그의 매화에 대한 애정의 마지막 응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의 매화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었다. 그는 ”내 평생 즐겨함이 많으나 매화를 혹애(酷愛)한다“고 하였다. 그가 이질(痢疾)로 설사를 만나 방에 취기가 스미게 되자“매형(梅兄)에게 미안하다”면서 옆에 있던 매화 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으라고 말하고는 환기를 시키고 매화 분을 정갈히 씻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앞으로 매화를 연구하고, 자료를 모으고, 사진을 찍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해방전후(?)가지고 간 와룡매(臥龍梅)도 탐매(探梅) 할 생각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