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빈틈'의 미학

강갑준 2004. 12. 7. 16:53
'窓"
“매화는 한 번 추위를 겪지만 그 향기를 팔지 않습니다.(梅一生寒不賣香)” 어느 분의 옥고를 치루고 나오면서 한 말이다. 그렇게 빗대어 말하는 지성인들이 많다. 고고한 덕목때문일까.지난해 전남 선암사 돌담 ‘틈’의 매화, 향기를 팔지 않듯 홀로 서 갈곳 몰라 하고 있었다. 그 매화, 내년도 어김없이 피고 힘든 세상에 청향을 내겠지... , 또 기다려 진다.


누구나 철이들면서부터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치열하게 살아야한다’라고 자신에게 타이르며 때로는 준엄하게 질책을 하며 생활의 시간 속에서 자기존재의 증명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아마 인생의 일회성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에서부터 일 것이다. 그래서 강박관념처럼‘뜨겁고 치열하게!’라는 모토를 내걸고 달리고 또 달려야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제대로 철이 조금씩 더 들어가면서 ‘삶의 속도’에 대한 정의에도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속도: 달리는 감각 뿐만 아니라 고요히 정지된 감각-이 모두가 속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달리는 데에만 속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할까. 머물고 고여 있을 때도 대단한 속도와 힘이 필요하다. 일필휘지로 물 흐르듯 거침없이 써 내려가야 당대의 최고문장가라고 칭해지던 당나라 시대에 유종원이라는 시인은 자기문장을 완성하는 제1기법으로‘疏之欲其通(소지욕기토통- 성글게 하여 통하게 만든다)’의 작법을 추구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살아갈수록 성글게 하여 틈을 만들어 바람이든 사람이든 그리고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까지도 서로 소통하게 만든다는 그의 삶의 예지와 성찰에 경외감이 든다.
또한 김지하 시인 역시‘틈’이라는 그의 시에서 ‘아파트 사이사이/ 빈 틈으로/ 꽃샘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속에/꽃 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틈 때문. 사람은/틈/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라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틈, 공간과 공간의 틈, 시간과 시간의 틈, 그 틈속에서라야 새로운 꿈이 뿌리내린다는 것을 말하기도 했다. 어디 시 뿐 이랴. 부산금정산성의 틈 역시 과학이 이루어낸 성취물 아닌가. 강한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굳건히 버티어내는 산성돌담의 축조비밀은 돌과 돌 사이의 틈, 그 공간의 간격을 통해 거칠고 변덕스런 샛바람을 오고가게 만든데 있다.


관념의 과도한 편식은 다른 세계를 인정하지 못한다. 너와 내가 다를 수 있고 그들과 우리가 다를 수 있다는 ‘관용(똘레랑스)의 정신’이 기저에 깔려 있어야만 나도 우리도 성숙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사회에 팽배한 ‘나와 우리’를 위해 단색의 논리로만 달려야 효율성이 높다고 인식하는 일그러진 실용주의는 어쩌면 다른 세계에 관용적이지 못하고 배타적인 미숙함의 증거라고 여겨진다.
고속도로처럼 한 편 길로만 치열하게 달리는 속도는 반대편에서 오는 세계를 바라볼 여유가 없다. 내가 가진 것, 내가 공부한 것, 내가 느낀 것이 많으면 그것이 옳다고 고집하던 시절도 삶의 한과정이라면 인생의 어느 길모통이에서쯤은 시선을 다르게 하는 법도 배워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식으로든 나를 지배해온 소유의 무게를 줄여 더 간결해지고 단단해진 채로 틈을 마련해놓아야 새 꿈이 들어갈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틈이란 그런 것이다. 이 틈에 대한 개념이 없이 무조건 달린다면 제대로 발효되지 못한 된장과 같다. 스스로 발효돼 무르익어가는 시간엔 권태도 때론 약이 될 것이다. 겨울의 냉기 찬 고요와 동면 없이 봄의 푸르름이 그냥 오겠는가.

매해 이맘때면 노란 잎으로 변신한 은행나무가 바람이 불 적 마다 그 황금빛 이파리들을 기꺼이 땅바닥으로 떨구는 눈부신 낙하의 장면을 보게 된다. 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틈’의 미학으로 스스로를 성글게 하여 삶의 바람이 잘 통하는 길 하나를 내 안에서부터 내는 지혜를 배우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