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상생하는 자연, 이 무심한 아름다움

강갑준 2004. 11. 22. 00:19
‘窓의 이미지’
쏜살같이 달려가는 2004년, 세월을 누가 풀었다 당기는가. 뒤 돌아보면 아슬아슬한 길들, 잘도 넘어왔구나. 가쁜 숨 삼키고 주위를 보면, 다시 찬바람 부는 벌판, 시린 손 잡아 줄 사람은 어디쯤에서 만날까. 주말이 더 공허로운 하늘, 햇살을 터는 새들의 날갯짓이 문득 서럽다.



새벽 감포 앞바다서 떠오르는 해를 보니 그 아름다움에 살갗을 마음껏 비벼 대고 싶었다.


그리고 경주 ‘삼릉’, 이곳 공기와 분위기는 먹먹했다. 내리 가슴 스산하니 초겨울의 분위기를 감당 못할 지경이다. 이리저리 카메라를 들이대며 헤맸더니 호젓하게 작업하며 걷는 숲길의 그 두툼한 침묵과 평화로움이 후광처럼 에워싸며 빛난다. 우두커니 서 겨울이 깊어 가는 ‘삼릉’의 풍광에 하염없이 잠겼다.


휘어지고 서로 얽힌 천년(?)소나무는 평화롭게 서 있고, 억새풀은 바람에 가끔 흔들린다. 그 위로 햇살이 부서지는 황홀한 광경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묵은 논밭 가장자리나 야산의 비탈에는 무시로 서식하는 억새와 바람 속으로 소멸하는 초겨울 풀들과 마른 짚더미가 놓여 있다. 바래고 퇴락한 색조는 이 겨울을 겨울이게 한다. 가만 짚더미에 누워 본다. 마른 흙들이 기꺼이 부서진다.


초겨울의 마른들에서 고요와 우주의 적막이 나를 마구 세상 밖으로 내몬다. 카메라로 어깻죽지를 툭 건드릴라 치면 나무들은 자신의 쇠락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나씩 둘씩 마른 잎새, 그 가벼운 존재들을 땅 위에 가만 내려놓는다. 차곡차곡 쌓여 썩기를 기다리는 자연의 완강한 순리와 법칙, 엄격한 질서에 새삼 경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은 인간을 한없이 겸허하게 만든다. 아쉬운 반시간의 숲 속 소요 속에 사유하고 명상하면서 풀잎에 앉아도 보고 풀벌레도 만나고 낙엽 색깔과 산빛, 공기와 자연의 모든 현상과 조화에 진지한 마음을 기울여 본다.


나는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사실은 그 자연과 얼마나 깊게 교감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을......,정직한 자연에서 배우고 그것을 평생 닮고 싶으며, 그렇게 살다 쓰러지고 싶다면,
그날 나는 처음으로 '눈이 맑은 지기'를 만났다. 35밀리 카메라 들고 하는 작업의 방식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멀리서 바라보고 무심하게 찍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새로움을 찾는 것 같았다. 단조롭고 심심해 보이지만 무엇 때문에 렌즈를 들이대고, 그 대상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의아해지는 그런 작업이었다. 그 ‘지기’의 의도적인 이 무시함과 심심함, 드라마의 배제와 스펙터클의 탈피가 그 ‘지기’의 사진 핵심이란 것을 느끼게 한 동기다.


다시 말해, 그 지기는 세심하고 지긋한 눈빛으로 자연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스며들어가고 그 과정 속에서 자연은 또 어떻게 스스로를 치유해 가면서 서로 상생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아마도 그 ‘지기’는 저 자연보다 못한 우리네 인간들의 질서와 반목과 아둔함을 말 할여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느꼈다.


한마디 하면, 그 ‘지기’의 작업은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멀리 벗어나 있으면서 대상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를 참혹하게 발설한다는 의미에서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하나의 틈으로, 상처로 벌어져 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생을 찍고, 생을 사는 동안 열심히 세상을 들여다보는 사진작가로서의 업에 가장 충실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늘 변함없는 침묵과 눈가의 잔잔한 웃음에서 선승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러나 피워 대는 담배의 니코틴은 주위 자연을 몹시나 괴롭혀 씁쓸함을 갖게하였다. “다음 또 한번 갑시다.” 그러죠, 그럼 다음주 계획 잡아 연락할 게요, 우리는 그렇게 약속하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