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부드럽게 찾아온 승학산 억새의 ‘하얀 유혹’

강갑준 2004. 10. 18. 20:52
소슬바람 받으며 반짝이는 은빛 물결
으악새 합창과 풀벌레 소리가 가을을 연주한다.


가을산인 승학산을 찾아 나섰다. 흔히 ‘동아대산(東亞大山)’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산. 대신동 꽃마을 지나 비좁은 콘크리트 길을 30여분 지나면서 뿌연 가을 하늘의 승학산을 찾아 나선 산행인들이 가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르고 있다.


아직 가을꽃인 억새가 소리를 머금어선지 승학산의 모습은 억새가 장관을 뒤로 하고 있다. 오후가 돼서인지 구름 속에 숨은 해가 가끔 이부 능선의 아름다움을 빤짝이게 한다. 서쪽 하늘로 해가 구름 밑에 숨어들었다. 가을이라기엔 더운 낮 기온에 옷은 축축이 젖어 버렸고, 다리에 휘감겨 찢어진 바지가 살결을 들어내며 움직이기에 힘들 정도이다.


‘아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저무는구나!’ 비통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맑은 하늘 능선 위에 흩뿌린 억새들의 향연, 도시에선 꿈도 못 꿀 호사다. 천구를 가로 지른 능선은 사금파리로 도배한 듯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고 있다.


‘너 산을 우습게 봤지. 아직도 한참 걸어야 할 걸’ 싱글거리는 억새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꾸짖고 있는 것 같다. 가끔 길가엔 흩뿌린 가을의 코스모스가 손짓한다. 또 소나무 몇 그루가 적당한 그늘을 드리워 주며 내리막길을 계속한다. 비교적 완만한 능선으로 접어들자 산세가 평이해진다. 등산로는 숲 사이에 묻혀 풍경이 숨박꼭질한다. 자그마한 언덕을 여러 차례 오르내리며 속도를 내본다.


승학산 능선에 역광으로 비쳐진 억새에 마음을 사로 잡히며 발걸음을 이끈다. 갈림길에 들어서면서 주능선을 버리고 서쪽의 지능선으로 산을 올랐다. 급격하게 고도를 낮추던 능선은 억새 숲에 다다르며 천천히 숨을 죽인다. 자그마한 둔덕을 넘어서자 커다란 절개 지위에 산소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저기가 명당일까’ ‘억새 숲에 누워 행복할까’ 중얼거려 본다.


조금 더 오르니 무릎이 시큰거린다. 승학산은 엎드리면 코 닿을 듯 가깝게 보이지만 구불구불 오르는 능선의 심술이 만만치 않다. 얼마쯤 올랐을까. 북쪽으로 금정산이 시야를 멈추게 한다. 억새숲 길가에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옹달샘에서 샘물이 졸졸 흐른다. 목마른 이들에겐 생명수 같은 것. 주변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했다. 샘에서 목을 축이고 억새 숲으로 올라선 시각은 이미 저녁 5시를 넘어서고 있다.

이제 저녁 해가 빠지려나. 해질녘 서쪽 하늘 시커먼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노을은 아름다웠다. ‘야, 저 봐라, 얼마나 황홀스럽나.’ 허지만 동쪽 하늘은 오랜만에 무더운 여름의 때를 벗을 듯 높은 양떼구름을 피워 올렸고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그림자를 드리운 채로 굴곡 깊은 산등성이의 역동적인 실루엣이 물결치고 있었다. 감탄이 터져 나왔다.


햇살이 드러누우며 그려내는 마술은 한마디로 환상적이었다. 그 어떤 최고의 조각품이 이토록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을까? 대자연의 엄청난 조화에 숙연해졌다.

승학산 억새밭, 부산 제일이라고 할만한 가보다. 올라가는 길에 만난 사진가. 육십을 넘어선 그가 라이카 6.2를 거머쥐고 피사체와 역광을 찾아든다. 올해 교직을 명퇴한 그 사진가는 낙동강 쪽으로 빠지는 햇빛이 아쉽다며, 일몰을 찾아간다. 하단 쪽으로 가물거리는 불빛과 함께 나의 의식이 초점을 잃어 가기 시작하였다.

터벅터벅 임도를 따라 걸어 내려오며, 나도 저 와같이 검붉은 하늘 속으로 걸어가려나. 승학산 가을의 억새밭, 일기 탓인지, 영글어 가다가 멈춘 듯 억새는 숨죽이며, 내년 2005년을 기약하는 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