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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꽃을 드니 미소짓다”

여름이면 짬을 내어 가을 문턱까지 연꽃을 보러 명소를 찾아 나서기를 6년, 올해도 경산 ‘삼천지’를 4번이나 찾아 갔으니 어떻게 말하면 연꽃에 환장한 사람인지 모른다. 이렇게 가는 것은 오늘은 어떤 꽃등을 밝히고 있을까 하는 설레임에서이다. 연꽃은 그 기품으로나 아름다움으로나 향기로나 꽃중의 꽃으로 꼽혀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상찬 받는다.
연꽃이라면 인당수 푸른물에 빠져 들어간 심청이와 ‘부생육기(浮生六記)의 운(芸)의 이름이 머리에 떠오른다.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백석에 팔려간 심청이는 드디어 연꽃속에서 다시 살아나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

‘부생육기’는 18세기 청나라 때의 화가인 심복(沈復)의 자서전인데, 운과의 사랑을 담은 부분이 특히 애틋하여 감동을 준다. 연꽃이 오므라질 저녁이면 그 꽃 안에 차를 넣어 향내에 재웠다가 이튿날 새벽 꺼내서 낭군에게 달여 내오는 운의 모습, 그 운이 저 세상 사람이 된뒤 애끊는 마음으로 풍진 세파에 시달리는 심복의 기구한 삶.
‘삼천지’ 연못에는 연잎이 날로 무성해지고 있다. 그러나 막상 마음먹고 찾아가 보면 언제나 연꽃은 헤아릴 정도로 피어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연꽃은 아직 안 피는 거요?” 연꽃을 따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왜요? 안피는 때가 없지요.” “그런데 지금은 없잖소.” “절에 공양 올리려고 아침 일찍 딴답니다. 이 작은 배가 있잖아요.”

그말에 나는 왠지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저 연꽃들은 절에 바치기 위해 아침마다 새 연꽃 봉오리를 뽑아 올린다. 그러나 미처 피지 못한 그 봉긋한 꽃봉오리를 자른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었다. 그래서 연꽃은 더욱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장엄이 되는가.


또 연꽃을 달리 부용(芙蓉)이라고도 부른다. 이 이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시(詩)가 보인다. 부용꽃 피어 연못 가득 붉으니/ 사람들은 내 모습보다 예쁘다 하고는/ 아침에 내가 둑위를 따라 거닐면/ 어찌하여 사람들은 꽃을 보지 않을까(나만 볼까)/
쓴 사람은 조선시대의 성천고을 기생으로 그 이름역시 부용이라 했다. 사람들이 그 예쁘다는 꽃은 보지 않고 오히려 자기만 쳐다본다는, 뜻을 살짝 비튼말. 맵시가 자못 어여쁘다. 그 모습 한번 보고만 싶어라.

잠깐!
나는 나의 개성이 드러난 사진을 찍을려고 한다. 타인에게서 인정받지 못해도 스스로 인정하는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이 나의 마음인 것이다. 작가의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좋은 사진이 안된다는 것을 알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런 후 마음의 눈으로 대상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이 슬며시 다가와 어느 순간 속내를 살짝 드러내고 홀연히 사라진다. 이 순간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대상과 진실된 교감만이 이 순간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알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