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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가을


가을인가보다. 이불을 걷어차고 자다 감기에 걸릴까 걱정케 하던 아이들도 이제는 얌잖게 이불을 덮고 잘 것이다. 아 해에게도 잠결의 밤공기가 차가운 것이다.

아직도 장엄한 여름의 행진이 끝나지는 않았다. 피서객들이 버린 욕정과 본능과 허영의 잔해들만이 흩어져 있는 바닷가 모래사장위에는 아직도 따가운 햇볕이 눈부시게 찬란하기만 하다.

햇볕에 검게 그을린 젊은이들의 얼굴에도 아직 여름의 입김이 남아 있다. 그들의 눈에도 아직은 여름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 토록이나 찬란하던 여름의 향연이 이토록이나 쉽게 끝나리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가을인 것이다. 하늘은 마냥 높다랗게 걸려있고, 마냥 푸르게 물들어 있다. 그리고 마냥 조용하기만 하다. 불협화음에 가득 찼던 한 여름의 광란이 끝나고 이젠 그저 나직한 벌레와 풀들의 협화음(協和音)들만이 들릴 뿐이다.

아직 지나가는 세월을 서러워할 때는 아니다. 모든 것은 마냥 아름답기만 하고 푸짐하기만 한 것이다. “안개와 감미로운 과실이 여무는 계절이여, 모든 것을 익혀놓는 태양의 절친한 벗, 추녀 끝의 포도 나뭇가지에 풍만한 송이를 붙여 축하를 보내주는 것이여...,”이렇게 가을을 노래한 것이‘키츠’였던가? 탐스럽게 익은 배, 묽게 타오르기 시작한 사과, 어디선가 석류가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그런 고요 속에서‘코스모스’가 수줍은 듯이 막 피어나고 있다. 정녕 여름은 다가버린 것일까. 사람은 꿈을 위해 산다. 아름다운 꿈, 거창한 꿈, 소박한 꿈, 부귀의 꿈, 사랑의 꿈......, 여느 꿈이나 계절과 함께 자란다. 계절과 함께 사람은 꿈을 잉태하고, 꿈을 키우고, 다듬고, 그리고 때로는 또 꿈을 바꾸고, 꿈을 파묻고......,

꿈과 함께 사람은 죽는다. 꿈을 잃었을 때 사람은 삶을 잃는다. 지금은 꿈을 키울 때는 아닌가 보다. 그렇다고 꿈을 장송(葬送)하는 슬픔에 젖을 때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대지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여름의 향연이 남긴 것들이 너무나도 탐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여름은 아니다. 들에서도, 숲에서도 또 떠들썩한 거리에서도 이젠 여름의 합창은 없다. 그저 가냘픈 가을의 독백(獨白)들만이 들린다.

“흥겨운 여름잔치가 왜 이리도 빨리 끝났을까? 외롭게 가을바람이 불고, 그래도 또 봄이 온다는 것일까?” ‘슈트롬’의 시(詩) 한 구절이다. 지금이 가을이라면 멀지 않아 낙엽지고, 그러면 또 겨울이 된다. 그런 속에서 봄을 기다리겠다는 게 쉬운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