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삐 서둘렀다. 한라산 일정이 하루 당겨져 6일 아침7시 20분 비행기 편으로 간다는 연락이다. 다섯 번째 가는 한라산이지만 벌써 감흥이 앞선다. 제주기상은 6일 흐리나 가끔 맑고, 7~8일은 흐린다는 예보다. 그래서 맑은 날 한라산을 오른다는 계획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제주는 평온하기만 했다. 검푸른 바다는 아침 햇살에 고기비늘처럼 반짝이고, 짚 푸른 들녘은 암갈색 돌담과 어우러져 차분히 가라 앉아 있다.
도착시간이 아침 8시30분경, 소문난 식당서 ‘갈치’국에 간단한 아침을 먹고 ‘영실코스’로 갔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은 굴곡 없이 쭉쭉 뻗은 적송군락이 아름답다. 나이가 들수록 붉은 소나무가 좋아진다. 나이가 많은 소나무에는 향기가 난다. 나도 나이 들며 저렇게 고울 수 있기를 바란다. 적송들 밑에는 조릿대가 가득하다. 영혼이 맑은 어린아이들처럼 경쾌하고 수다스럽다. 조릿대 바람은 친하다. 속삭이는 듯 다정하다가 싸우는 듯 와삭대기도 한다.
이름 모를 나무, 돌마다 짙은 이끼가 끼어 있어 더욱 냉기가 돈다. 등산로는 나무계단으로 이어져 숲 우거진 고즈넉한 산길이다. 숲을 빠져 나가자. “깔딱 고개‘나 나온다. 벅찬 숨을 몰아쉬며 ‘오백나한’을 들여다본다. 맑은 하늘이 가끔 열리며 구름에 휩싸여 든다. 등산로에는 해발 100m마다 높이가 표시돼 있으나, 언덕을 넘어 선 다음 산길은 점점 가팔라진다. 산길이 탐방객들의 발길과 폭우에 심하게 패여 나가자 나무계단을 깐 것이다.
산을 오르는 이들이나 바위에 앉아 휴식을 하는 이들이 모두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후텁지근한데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으니 모두들 힘겨울 수밖에―,
깔닥고개를 지나면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앞이 터지며 초원이 펼쳐진다. ‘백록담’의 담녹색으로 우람한 표정이다. 가끔 파란 하늘이 터지고 윗세오름 휴게소로 이어지는 평원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자 얼굴빛이 환해진다. 오름 약수에서 갈증을 달랜 다음 등산로에서 벗어나 백록담을 한컷 담았다. 빛 방향이 4시라 광선이 맞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니, 하며 셔터를 눌러댔다.
‘윗세오름’ 휴게소에 도착, 김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지인을 찾아 가방을 보관하고, 만세동산쪽으로 철쭉을 찾아 나섰다. 한 15분 거리에 저녁햇살의 ‘철쭉’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조릿대’를 헤치며 풍광을 찾아 카메라 앵글을 맞추며 셔터를 눌러댔다. 그 틈새엔 초원을 달리는 노루들이 보인다. 어떤 놈은 새끼와 함께 장난치느라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어떤 놈들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풀을 뜯는다. 그러고 보니 한라산은 노루들에게는 평화의 땅이다.
해가 서산을 넘어 가면서 여름 한라산은 생동감이 넘친다. 초록, 연두, 노랑, 철쭉 등 그 어느 보석보다 더 다양하고 아름다운 빛을 낸다. 어디선가 노루도 뛰어나와 이리저리 달린다. 노루들도 신이 났나보다 “꺽, 꺽~” 소리도 질러댄다. 새소리도 들린다. 바람소리도 더욱 거세진다. 이것이 한라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자연의 교향곡인가―,
해지 떨어지기 전 “백록담”과 철쭉을 담으려고 노루샘약수쪽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시계는 오후 4시50분, 한라산은 기이한 것 같다. 바람과 구름은 한 순간도 한라산을 같은 모습으로 놓아두지 않는다. 파란 하늘아래 날카롭고 산등성이와 깊은 계곡을 벌여놓았다가 순간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몰려오면서 산등성이는 구름을 타고 있다. 그러다가 구름이 더욱 두떱게끼면 암흑의 세계로 변하곤 한다. 어느 것이 한라산의 진짜 모습인가 궁금해진다.
윗세오름 휴게소에 돌아왔을 때 광장은 텅 빈 채 바람만 불고 있다. 한라산국립공원 규정상 여름철에는 오후4시 이전에 이곳에서 하산을 시작해야 하기에 탐방객들이 모두 내려가 버린 것이다. 시간은 이미 오후 6시10분을 넘어서고, 구름이 몰려오면서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짙은 구름에 화구벽은커녕 그 좋은 포인트 찾아 들지 못하고 어리목으로 하산 길을 잡았다. 어찌나 일행들이 빨리 내려오는지, 옷은 땀에 흠뻑 젖고, 다리는 후들거리며 통증이 온다. 그러나 젊은 지인들은 100m이상 앞질러 내려간다. 서운함이 든다. 연신 애를 쓰며 내려와 어리목 광장에 도착한 시간 8시 10분쯤-,
나의 등산 철학은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페이스를 건강에 맞게 조절해야 한다는 것인데, 일행들 때문에 혼쭐이 난 것이다. 그러나 우도, 산방산, 추사거적지, 자성원, 송악산, 분재예술원, 제주돌 문화원 등 다양한 곳을 둘러봤다. 여행은 이렇게 고통이 있는 반면 즐거움이 기억으로 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