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스케치’
지난 24일, 가을을 앓아 집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서재에서 두리번 거리다 ‘파카 51 만년필’과 눈이 마주쳤다. 만년필을 쥐고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간다. 이 만년필과 오디오 ‘피샤’ 진공관 앰프 등이 나와 삶을 같이 해온 것들이라 이들을 글감으로 한번 끄적거려볼까 한다.
10월의 끝자락. 푸르게 야위어 갈 뿐 물들지 못한 숲, 누렇게 앓고 있을 뿐
여물지 못한 들녘, 우리 너무 쉽게 가을을 건너왔다. 단풍 한 잎, 쌀 한 톨의 무게도 알지 못한 채, 시름의 강가 철 없는 바람처럼, 속절없이 흔들리는 갈대 숲, 비에 젖는 저 처연한 흰손들,
기자 생활 20년에 남은 것은 책상 서랍에 쌓인 각종 볼펜과 잡동사니, 문구류 밖에 없다는 고인이 된 어느 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나 역시 그렇다. 이순(耳順)을 넘어선 지금, 나에게도 ‘파카 만년필’ 4개, 또 그 유명한 ‘몽블랑’의 대표격인 마이스터스튁에 금장 처리를 한 솔리테어 골드 만년필, 이젠 이 만년필들이 나와 운명을 같이 할 소장품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라이카 M7’ 필름 카메라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70년 12월, 사랑하는 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파카51’은 나의 생명과 같이 할 애장품이라 부를 만큼 내게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술담배를 못 배운 탓에 소리를 좋아해 친한 벗으로 삼아온 명기 ‘마크레빈슨’ ‘탄노이’ 소리통. 이를 25여 년 동안 즐겨 듣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광’이고 얼핏 생각하면 ‘소리의 황홀’을 엿듣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올해 책 속의 꼬드김에 솔깃해 회사조차 없어진 미국의 ‘피샤’ 진공관 골동품 70년 된 앰프를 들여놓고선 혼자 빙그레 웃기도 한다. 내겐 세상 시름을 다 어루만져 주는 따뜻한 소리다. 다시 말해 ‘귀로 듣는 보약’인 셈이다.
책을 들춰보자면, 전공서적인 ‘법률책’은 지금도 미련(?)이 남아 소장하고 있고, 요즘은 사회 흐름에 관련된 가벼운 책이나 명상집 등 비소설류를 훑어보는 편이다. 나의 독서습관은 다독에 가까운 편이며, 한 달에 5-6권 정도 읽는 것 같다. 그리고, 사진을 찍기 시작한 후, 피사체와의 좀더 깊은 교감을 위해 일본 잡지를 매달 본다. 그러나 일본어를 익히지 않아, 그림을 보는 정도이다.
내 생각의 실마리는 흔히 출근길에서 이루어진다. 출퇴근 시간의 붐비는 승용차 안에서 나는 삶의 밀도 같은 것을 실감한다. 편집실(?)에서 하는 사색은 한적하긴 하지만 어떤 고정관념에 갇혀 공허하거나 무기력해지기 쉬운데 승용차를 타고 가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주말, 출근길에 들어서는 낯익은 풍경... 모두 가을 속에 들어갔구나. 들녘은 가을걷이에 몸 달고 단풍잎은 속 타겠지. 어스름에 유혹하듯 돋아나는 주점 불빛, 빈구석 챙겨 낮말 쏟아 붓고, ‘10월의 마지막’을 삼킬 때, 지친 가을 가쁜 숨소리, 홀로 가는 그대,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이순(耳順)의 가을은 난감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