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이명(耳鳴)처럼. 안으로 안으로 억눌렀던 울음처럼. 뜨락 적시는 가을비 소리. 억새풀 바람에 진저리치고, 짓까불던 참새 황급히 몸을 숨긴다. 찬비 그치면, 무성하던 가지도 겸허히 옷을 벗겠지. 거대한 자연의 순환, 하지만 떠날 길 떠나지 못하는 인간은 얼마나 초란한가. 신열(身熱)삼키며 떨고 있는 코스모스. 가는 비에 마음까지 젖는다.
세월은 빠른 것이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잡히고 검버섯이 무성한 노인을 보고 젊은이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쩌다 저꼴이 되었을까'하고. 그러나 저 노인이 옛날부터 ‘저꼴’ 인 것은 아니다. 어떤 노인도 한 30년전에는 다 보기가 괜찮았는데 그만 세월 때문에 ‘그꼴’이 된 것이다.
젊은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나이에 삼십년쯤 가산하고, 그런 나이가 되었을 때 과연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자기만은 늙지 않고 언제나 젊어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젊은 이들도 없지 않다. 그런 큰 착각이 또 있으랴. 사람은 누구나 세월과 더불어 늙게 마련이다. 늙음을 멸시하는 젊음은 마침내 저도 늙어서 젊은이들의 멸시를 받게 마련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세월이 하도 빨라서 이젠 무슨 말을 하기도 싫다. 30이 되기까지는 그래도 세월이 더디 갔다. 30의 언덕에서 갑작스레 빨라진 세월의 템포는 40이 되면서부터 정신없이 달린다. ‘마흔’이 되던 그해부터 주루루 흘러서 50의 언덕으로 밀려간다. 그래도 좀 제대로 토막이라도 치면서 50까지는 정말 무심하게 흘렀다.
공자는 ‘나이 50에는 하늘의 명령을 헤아리다(五十而知天命)’ 라고 하였으니, 지천명의 언덕에서 ‘하늘의 명령’이 과연 무엇이던가? ‘하늘의 명령’은 매우 간단, 명료한 한마디 뿐이다. ‘내가 너를 불러갈 날이 멀지 않았으니 준비하도록 하여라.’ 그것뿐이다. 하늘은 설명도 해석도 하지 않고 얼굴을 돌린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인생의 가을이 온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추수 때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청산할 때이다. 나이 55세에서 다시 이어서 60세로 점프하는 꼴을 보라.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신세일 것이라는 생각도 빠뜨리지 말아야한다.
예순에서 일흔 사이에는 65세라는 디딤돌 하나도 없다는 선배들의 말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60-70 그리고 끝’ 아아, 너무도 세월이 허무하다. 그러나 나는 세월이 물같이 흐르는 것을 사랑한다. 이 세월의 물위에 흘러가는 내 쪽배를...
영국의 ‘랜더’라는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나 아무와도 다투지 않았거늘/ 아무도 나와 다툴만 못하였네/ 나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 다음으로 예술을 사랑했지./ 나 두손 녹이던 인생의 불길 꺼져 가니/ 떠날 준비는 다 되어 있다네./
‘랜더’는 나이 몇 살 이나 되어서 이런 시를 읊었을까. 꽤 연세가 많아진 어느 생일에 지은 노래라고 들었다는 기억이 난다. 떳떳하게 살다가 가기 위해서는 준비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인생이란 바람끝에 매달린 꽃잎 같은 것
부르면 괜히 눈물이 나는 이름이 있습니다. 공원묘지에 자리 펴고 누워 계신 장인(丈人), 국화꽃 한 묶음 저승 앞에 놓습니다. 인생이란 바람 끝에 매달린 꽃잎 같은 것. 울컥 생목 오른 향기, 장인, 여기 갈퀴 같은 생을 부려놓고 갑니다. 성묘 가는길,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빗줄기.
단풍의 계절이 온다.
지난해 11월 중순쯤 불국사 경내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단풍이 타는 까닭을 나는 모른다. 하느님도 참, 금방 질 단풍 왜 저리 곱게 태우시고, 들녘의 황금빛 꿈은 왜 쭉정이로 버리시는지.
하느님도 참, 왜 절망속에 희망을, 불행속에 행운을 감춰놓으셨는지. 그래요 보세요. 일어서는 인간들을 ,먼 남녘 태풍 또 띄우셨지만, 가슴속에 품은 등불은 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끝의 시작, 시작의 끝. 사람들은 인생을 어느쪽에 매달까. 어느새 우리 모두 가을 깊숙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