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한 구석에서 늘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
아득한 곳이란 단순히 멀고, 깊고, 그윽한 오지일 수도 있다.
눈빛이 다른 사람들이 사는 맟선 이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은 이곳이다’라고 말할 때, 그 뜻은 자칫 사라진다.
그러면 그곳은 어디인가.
‘생득적’
그곳은 결국 내 마음속의 어떤 곳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삶의 한계이다.
내 마음은 때때로 한없이 아득하다. 그 아득함은 또 다른 아득함으로써만 치유된다.
족히 백년을 넘었을 나의 고향 집 뒤뜰에 동백꽃을 본다.
물론 어느해 겨울 찍은 우리집 동백꽃,
그 동백꽃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시간에 머물러, 갈수는 없고,
할머님을 떠 올리며 그 붉은 동백꽃을 본다.
아득한 곳이란 단순히 멀고, 깊고, 그윽한 오지일 수도 있다.
눈빛이 다른 사람들이 사는 맟선 이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은 이곳이다’라고 말할 때, 그 뜻은 자칫 사라진다.
그러면 그곳은 어디인가.
‘생득적’
그곳은 결국 내 마음속의 어떤 곳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삶의 한계이다.
내 마음은 때때로 한없이 아득하다. 그 아득함은 또 다른 아득함으로써만 치유된다.
족히 백년을 넘었을 나의 고향 집 뒤뜰에 동백꽃을 본다.
물론 어느해 겨울 찍은 우리집 동백꽃,
그 동백꽃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시간에 머물러, 갈수는 없고,
할머님을 떠 올리며 그 붉은 동백꽃을 본다.
동백꽃은
할머님이
매양 보며 울던 꽃.
할머님이
매양 보며 울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