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가본다 하면서 미루다, 지기들과 부산근교 ‘대나무 숲’을 찾았다. 어느 조그만 암자, 수십년된 대나무가 수려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터라, 어떻게 보면 필자가 가고 싶어서 주위 지기들을 부추긴 동행인지 모른다.
미안한 감이 든다. 바닷가 인근 대나무숲은 오늘도 바람을 휘 날리며 그 소곤거림이 정겨웠다. 곧은 성품대로 절개를 표현하듯, 하늘을 찌르며 봄을 기다리는 것 같다. 언제나 변함이 없는 그 성품은 나를 더 한번 반겨워 한다. 단아하고 소박하면서도 기풍있는 그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하다.
윤선도는 오우가(五友歌)에서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이어 비었는다/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이렇게 노래했다.
필자는 이 ‘대나무숲’을 찾으며 성철스님, 그의 딸 불필(不必)스님을
떠 올렸다. 올챙이 기자 시절, 취재 지시를 받고 이 곳을 찾은 것이 벌써 27여년을 지난 일이다. 취재메모의 기억을 꺼내면, /한국전쟁 피난시절 성철스님의 딸 불필스님이 이 대나무숲이 딸린 암자에서 선(禪)을 공부하고 있는 아버지인 스님을 찾아갔다 는 것,/ 성철스님은 처음 딸인 수경(불명:불필)을 만나자 마자 ‘가라’고 호통쳤다는 것./ 이곳 주지인 도반인 향곡(香谷)스님은 수경을 다정하게 “내딸”이라며 달래주었다 는 것./ 그후 수경은 출가를 해 비구니스님이 되었다는 것이 취재 대강이다./
그당시 주지의 이름은 기억이 없다. 다만 차한잔 놓고 그 일화를 그는 이렇게 전했다. 이런 사실이 있는 조그마한 암자 곁 ‘대나무 숲’이다.
필자는 이 ‘대나무 숲’을 나서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 세상이 잠깐인데 부질없는 일에 얽메여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를 되돌아 봅니다. 이 얽메임에서 훨훨벗어나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할때, 비로소 제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일이 나의 몫이 아닌줄 알면서도 둘레의 형편 때문에 마지못해 질질 끌려 간다면 그것은 온전한 삶일 수 없습니다.
서로가 창조적인 노력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오고가며 만나는 사이를 어떻게 친구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런 무가치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쓰레기더미에 내 던저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창조적인 삶은 언제나 어디서 어떻게 지내건 간에 가치를 부여할 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새로운 시작이 뒤따라야 합니다. 새로운 시작이 없으면 그 무슨 이름을 붙이건 간에 타성의 늪에 갇혀 이내 시들고 맙니다.
웅덩이에 괸물은 마침내 썩게 마련입니다. 흐르는 물만이 늘 살아서 만나는 것 마다 함께 사는 기능을 합니다.
미안한 감이 든다. 바닷가 인근 대나무숲은 오늘도 바람을 휘 날리며 그 소곤거림이 정겨웠다. 곧은 성품대로 절개를 표현하듯, 하늘을 찌르며 봄을 기다리는 것 같다. 언제나 변함이 없는 그 성품은 나를 더 한번 반겨워 한다. 단아하고 소박하면서도 기풍있는 그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하다.
윤선도는 오우가(五友歌)에서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이어 비었는다/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이렇게 노래했다.
필자는 이 ‘대나무숲’을 찾으며 성철스님, 그의 딸 불필(不必)스님을
떠 올렸다. 올챙이 기자 시절, 취재 지시를 받고 이 곳을 찾은 것이 벌써 27여년을 지난 일이다. 취재메모의 기억을 꺼내면, /한국전쟁 피난시절 성철스님의 딸 불필스님이 이 대나무숲이 딸린 암자에서 선(禪)을 공부하고 있는 아버지인 스님을 찾아갔다 는 것,/ 성철스님은 처음 딸인 수경(불명:불필)을 만나자 마자 ‘가라’고 호통쳤다는 것./ 이곳 주지인 도반인 향곡(香谷)스님은 수경을 다정하게 “내딸”이라며 달래주었다 는 것./ 그후 수경은 출가를 해 비구니스님이 되었다는 것이 취재 대강이다./
그당시 주지의 이름은 기억이 없다. 다만 차한잔 놓고 그 일화를 그는 이렇게 전했다. 이런 사실이 있는 조그마한 암자 곁 ‘대나무 숲’이다.
필자는 이 ‘대나무 숲’을 나서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 세상이 잠깐인데 부질없는 일에 얽메여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를 되돌아 봅니다. 이 얽메임에서 훨훨벗어나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할때, 비로소 제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일이 나의 몫이 아닌줄 알면서도 둘레의 형편 때문에 마지못해 질질 끌려 간다면 그것은 온전한 삶일 수 없습니다.
서로가 창조적인 노력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오고가며 만나는 사이를 어떻게 친구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런 무가치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쓰레기더미에 내 던저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창조적인 삶은 언제나 어디서 어떻게 지내건 간에 가치를 부여할 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새로운 시작이 뒤따라야 합니다. 새로운 시작이 없으면 그 무슨 이름을 붙이건 간에 타성의 늪에 갇혀 이내 시들고 맙니다.
웅덩이에 괸물은 마침내 썩게 마련입니다. 흐르는 물만이 늘 살아서 만나는 것 마다 함께 사는 기능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