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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지나가는 비구니의 자태 고은듯 슬퍼라

여러분은 몇해 전 우리네 마음을 아프고, 씁쓸케했던 ‘산골 소녀 영자’를 기억하시는지. TV와 광고에도 나와 천진한 웃음을 보여 주었던 그 ‘산골 소녀 영자’가 머리를 깍고 비구니가 되었다는 보도를 듣는 순간, 필자는 한동안 머리가 멍해지면서 가슴속에 뜨거운 돌덩어리들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 들꽃같은 아이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한 세상이 저주스러웠고 뜨거운 분노가 치솟았던 것이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산골소녀 영자가 속세를 떠나 끝내 절로 들어서야 했던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가지산 ‘석남사’에 가자는 어느 분의 말에 왜 갑자기 기억 저편에 사라졌던 산골소녀가 불쑥 떠올랐는진 모를 일이다. 터무니없다 생각하면서도 혹시 ‘산골소녀 영자’가 그곳에서 수행하고 있지나 않을까, 혹시 만날 수 있다면… 이라는 직업의식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비구니 스님의 대답은 ‘모른다’는 말이었다.


사람은 늘 길을 따라 움직인다. 때로는 목적지가 있기도 하거니와 어느 때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길도 있다. 길은 과정이며 전부일 수 있다. 그래서 수행을 가리켜 길(道)을 닦는 일이라고 하지 않은가. 길은 가기 위해 있으니 앞으로 가는 것은 행도(行道)의 미덕이다.
길은 머무는 곳이 아니며 주저앉아 있는 곳도 아니다. 길에는 전후(前後)가 없다. 다만 가는 것뿐이다. 그저 가는 길이므로 그 길에 목적을 두는 것은 길의 올바른 쓰임이라고 할 수 없다. 마땅히 머무는 그 마음을 낼지니…. 바람은 허공에 머무는 바 없이 소리를 만들고 수행자의 마음도 머무는 바 없이 수행의 마음을 내야 마땅하다.
출가자의 길은 구름이고 물(雲水)이라고 하였다. 구름과 물은 머물러 있지 아니하며 움직임으로써 미덕을 삼는다. 머물면 쉬고 싶으며, 쉬고 나면 도(道)와는 이미 먼 길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 수행자의 오고감이다.


머문다는 것은 집착을 의미한다. 머물면 그곳에 애정이 생기고 곧 헤어짐의 고통이 따른다. 굳이 따져보자면 몸과 마음에 욕심을 두는 것이 착(着)이고, 몸과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바람과 같으며, 혹은 구름과 물같은 것이 수행하는 이의 원래의 길이다 보니 이들을 가리켜 운수(雲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 정해진 이치이다. 어느 한곳에 있고자 하는 것은 욕심일 뿐, 한 곳을 고집한들 그곳에 머물고 있는 스스로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머물고자 하는 욕심도, 가자고 하는 마음도 두지 않는다. 인연을 따라 움직일 뿐이다. 만물이 생기고 사람임이 그저 인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듯이 수행자의 발걸음도 이미 그와 같다.
아침에 돋아나는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하고 여름 한철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머물러 있는 것은 작은 세상이며 끊임없이 걷는 것은 큰 세상을 도모하는 일이다.
대소(大小)를 가늠하는 일에 절대적인 잣대는 없다. 다만 푸른하늘 위로 올라선 후에라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혹은 티끌이나 아지랑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부지런히 길을 가며 자신을 가늠하여 분발한다. 장구(長久)한 것은 하늘과 땅의 이치이며 진리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는 이가 변하지 않은 것에 의지한다고 함은 자신의 발걸음을 푸른 하늘 위에 자유롭게 두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산중(山中)을 그리워하지만 산문(山門)은 늘 사람들로 열려있다. 또한 산문을 들어선 이는 다시 그 산문을 통하여 내려온다. 산문은 들고 나는 문이다. 그러나 산문에 들어감과 나감의 구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번뇌를 받아들이는 산문은 산으로 향해 있으나 보리심을 구한 산문은 다시 세간으로 향한다. 세간으로 다시 돌아 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몸을 빌어 마음을 얻는다. 번뇌를 빌어 보리심을 얻으며 중생을 빌어 보살을 이룬다. 그러나 그 마음을 얻음으로 몸은 더욱 의연해진다. 마음과 몸을 따로 구분할 것이 어디에 있는가. 번뇌와 보리심의 차이를 어디에 둘 것이며, 보살과 중생이 서로를 가려 존재하는가. 하늘은 늘 대지를 살피며, 대지는 하늘을 품는다. 이것이 세상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바른 법이다.
산문을 나선 이에게 시중과 산중의 구분은 이미 없어졌으며 중생과 이미 한 몸이다. 이런 이유로 출가 수행자의 깨달음은 자신의 것만은 아니다. 수행자의 깨달음은 중생을 위한 것이며, 여러 중생이 함께 깨달음을 얻은 것과 같다. 출가인의 수행도 이와 같다. 수행자는 생활을 빌어 수행을 삼으며, 중생은 그 수행을 빌어 생활로 삼아 진리의 향기를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