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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불안한 환자

나는 의사에 대해 별로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타고난 체질이 건강해서인지 병원을 찾아 의사에게 굽실거리며 곱지 않은 그들의 말에 신경을 모아 본 일도 없거니와,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도, 결론적으로 의사를 비아냥거리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생명외경의 윤리를 더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쓴 것이다.


환자를 보던 의사가 말했다. ‘오늘 참 잘 오셨소.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환자는 눈이 둥그레졌다. ‘왜요, 위독한 병인가요?’ ‘아니오. 내일 오셨으면 저절로 나을 뻔했으니 말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익살맞은 소리다. 의사를 보는 눈은 동서양이 따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의사는 의사대로 고충이 없지 않다. 이런 일화도 있다. ‘오끼나와 하시게오(沖重雄)라는 일본의 유명한 내과의가 있었다. 그가 동경대학을 정년퇴직하면서 자신의 임상 생활에 관한 소감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때 자기의 연평균 오진률은 14.2%였다고 밝혔다. 세간에선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권위 있는 의사가?’ 사람들은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의학계의 반응은 판이했다. “역시 오끼나와선생은 다르군!” 감탄해 마지않은 것이다. 요즘의 병원은 어떤가. 한 종합병원 의사의 수필을 읽으며 웃음 지은 일이 있다.

그는 우리나라 병원을 ‘3시간 5분’이라고 풍자하고 있었다. 환자가 병원엘 찾아가면 3시간 기다려서 5분간 진료를 받는다는 것이다. 과연 그 5분 동안에 한 인간의 심장에 어느 정도의 생기를 불어 넣어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병의 규명은 적어도 의사의 지식과 경험이 면밀하게 구사되어야 하고, 또 그 증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검사를 필요로 한다.

의사는 그런 기초위에서 약을 처방하게 된다. 이런 일들은 우체국에서 소인을 찍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의사의 진료는 환자를 다만 생물학적 측면에서 관찰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진단에는 열심이지만 치료를 경시하는 풍조, 환자를‘ 모르모토’의 경우와 다름없이 관찰하려는 태도, 자기의 연구논문을 위한 자료로 보는 분, 입원환자를 경영의 객체로 생각하는 병원의 운영방식들을 ‘베드’ 위에 누워있는 환자들이 은연중에 의식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고통을 주는 일이 된다.

의학은 생명을 다루는 과학적인 이상,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성격을 외면할 수 없다. 이론으로서의 의학, 기술로서의 의학, 도덕적 실청으로서의 의학, 이 세 가지는 의도(醫道)에서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조건이다.

최근 어느 의대 교수는 병원의 환자들이 하나같이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논문을 발표해서 화제가 되었다. 그것은 병에 대한 불안보다는 그 병을 다루는 의사와 병원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나는 의사에 대해 별로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타고난 체질이 건강해서인지 병원을 찾아 의사에게 굽실거리며 곱지 않은 그들의 말에 신경을 모아 본 일도 없거니와,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도, 결론적으로 의사를 비아냥거리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생명외경의 윤리를 더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쓴 것이다.
학창시절을 같이 한 벗들도 생명을 다루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 그들도 가끔 만나면 손님이 없다는 등, 경제논리에 얽힌 말을 자주 한다. 나는 그런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편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슈바이쳐’박사는 “나는 살려고 하는 여러 생명 중의 하나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생명에 관해 생각할 때, 어떤 생명체도 나와 똑같이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가졌고, 따라서 존중하는 의무를 느낀다. 선의 근본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높이는데 있으며, 악은 이와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 올바른 성장을 막는 것을 뜻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얼마나 명문인가? 불안한 환자가 생겨나는 것, 시대의 흐름일까? 아니면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 때문일까?